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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추억

천재와의 재회

by KangP_ 202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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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천재’라는 말이다. 감탄사처럼 내뱉는 ‘오~ 천잰데?’ 따위의 말 말고 특정 분야에 남다른 실력을 타고난 사람을 이르는 그 ‘천재’ 말이다.

나는 못 들어 봤지만 주변에는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중학교 친구 A다.

A는 글을 잘 썼다. 책벌레였던 그는, 당시 중학생인 우리에겐 이름조차 생소했던 대문호들의 작품을 이미 섭렵하고 있었다. 이런 바탕이 있으니 글을 잘 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그는 무협지를 즐겨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직접 무협 소설을 써서 연재하듯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녀석의 흡입력이 있는 필력에 매료되었고, 애간장을 녹이며 다음 편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무협지를 즐기지 않던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건축일을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집은 화려한 2층 단독 주택이었다. 거실의 창은 원기둥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하루 종일 햇빛이 잘 들었다. 벽과 천장은 벽지가 아닌, 당시 유행하던 문양이 있는 짙은 고동색 나무 타일 형태로 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난간을 손으로 문지르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당연히 그는 국문학을 전공으로 대학에 갔다. 우리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었지만 아쉽게도 대학 진학과 함께 A와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운 좋게도 충북학사에 추가 합격된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외대 앞에서의 하숙을 접고 개포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등학교 친구들도 여럿 있었기에 A에 대해 물어보곤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와 연락이 닿고 있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대학 생활이 깊어지면서 나의 기억에서도 A는 시나브로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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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학년 언젠가였을 거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학 친구들과 얼큰하게 한잔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1호선을 타고 가다가 3호선으로 갈아타야 하기에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됐다.

“창묵이 아니야?”

3호선으로 갈아타고 출입문에 기대어 비틀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겼던 A가 삐딱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자리가 나서 앉았는지, 여전히 서서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우린 반갑게 인사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눴다. 못 본 사이 녀석은 말투며 행동거지가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대학을 그만두고 유흥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릿속에 멍해졌고 거짓말처럼 취기가 사라졌다. 문학 소년을 꿈꾸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A가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안 돼 아버지가 하시던 건설 사업이 부도가 났단다. IMF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홀로 고군분투하며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날 녀석에게 직접 들은 것인지,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인지 확실치 않다.

문학 소년이었던 까까머리 중학생 때와 180도 변해 버린 친구. 그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지하철은 내 목적지인 도곡역에 도착했다. 우린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손을 놓으며 녀석은 '좋은 데서 놀고 싶을 때 연락하라'며 웃음을 보였지만 우린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았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기억이다. 지금쯤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제는 가장의 짐을 내려놓고 다시금 문학 소년의 꿈을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님 여전히 돈과 빚의 멍에를 홀로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친구의 이름을 검색해 본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부디 중학교 시절 매혹적인 필력을 자랑하던 그의 글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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