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예전에 알고 지낸 가수 매니저 이사님을 만났다. 겸사겸사 청주에 들른 김에 제작국장과 점심을 같이했고 나에게도 연락을 준 것이다.
가요 프로그램을 담당할 때는 많은 가수 매니저들로부터 연락을 받곤 했다. 안부를 물으며 언제 한 번 내려와서 식사 자리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였고, 그 이면에는 자신의 가수를 무대에 올려 주길 바라는 본심이 녹아있었다. 계산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가수의 방송 스케줄을 잡고 대중에게 노출시키는 것이 이들 본연의 업무 아니던가.
가요 프로그램이 없어지면서 이런 류의 전화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많은 매니저들의 간곡한 부탁을 에둘러 거절하는 게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는데 어찌 보면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사실, 방송 일을 하면서 매니저들과 관계 유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살가운 성격도 아닐뿐더러 어찌 보면 ‘을’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과도한 공손과 고개 숙임이 종종 위화감으로 다가왔다(물론 셀럽들에겐 우리가 을이다). 인사치레처럼 내뱉는 ‘좋은 기회 있으면 연락드리겠다’는 하얀 거짓말과 희망 고문도 맘이 편치 않았다.
주변에는 매니저와 형 동생하며 사심 없이 지내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성격이 못 됐다. 일로 맺어지는 관계는 매사 조심스러웠다. 그 이면에는 입사 초의 경험이 있었다.
이십 대 후반,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그때는 인간관계를 학창 시절 관계의 연장선쯤으로 생각했다. 사심 없이 사람을 좋아했고, 한 번 내 사람이라 생각되면 의리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회는 내 생각처럼 순수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풋내기 시절, 사람 관계에서 남모를 상처를 받았고, 다시는 같은 아픔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은 쓰라린 생채기를 갑옷과 같은 굳은살로 만들었다. 어쩌면 이런 배타적 기질 때문에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인연마저 스쳐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20년 짬밥 덕에 과거보다는 사람 보는 눈과 관계 유지의 노하우가 조금은 생겼다. 그럼에도 여전히 관계 맺기에 조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건 조심성과 의심이 많아지는 과정일지 모른다.
오늘 만난 이사님은 몇 해 전에 가수 매니저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에는 어떤 부탁도, 기대도 없었다. 그저 청주에 온 김에 얼굴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었단다. 그 말이 고마웠다.
우리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이사님이 이야기했고 나는 들었다. 듣다 보니 그동안 이사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심 없는, 마음 편한 만남이었다.
사람 관계는 때론 일처럼 피로하고 때론 친구처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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