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어깨 안마를 받고 있었다. 나이 불문 월요일은 피곤한 날이다. 특히 금요일부터 2박 3일로 캠핑을 다녀온 후라 더욱 그랬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텐트를 치며 고생한 남편이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평소와 다르게) 군소리 없이 어깨를 주물러줬다.
앓는 소리와 함께 안마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가려웠다. 흰머리 날 때 머리가 가렵다는 말이 있던데, '이제 나도 멋진 백발의 중년이 되는 건가?' 하며 긁적이는데, 어라? 이건 좀 심한데?
가려움은 순식간에 머리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상체로 번져갔다. 지르텍을 먹었는데도 호전이 없어 찬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기 밑에 있을 때는 다소 완화되는 것 같더니 물기를 닦으면 다시 재발했고 설상가상으로 긁은 부위에 두드러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르텍을 하나 더 먹고 상태를 지켜봤지만 소용없었다.
내 모습을 본 가족들은 혼비백산했고 아이들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내팽개치고 달려와 아빠 괜찮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내는 캠핑 가서 잡아온 조개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 때문인가 의심했지만, 조개칼국수를 즐겨 먹는 나로선 납득할 수 없었다(대부분의 두드러기는 원인을 모른다고 한다).
세 여성은 시뻘건 몸뚱이를 침대로 옮겨 눕히고 얼음찜질을 해댔다. 두 딸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특히 평소 아빠를 개 닭 보듯 하던 둘째의 글썽이는 눈망울은 가려움의 고통 속에서도 감동을 줬다.
"응급실 가 볼까?"
여느 때 같았으면 '뭘 이런 걸로 병원을 가냐'며 흘려들었을 아내의 제안에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가려워도 사람이 죽을 수가 있겠구나 싶었다. 옷을 입는데 한참이 걸렸다. 긁기 바쁜 나머지 옷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응급실에 도착했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려움과 두드러기는 팔과 다리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윤정권의 일방적이고 막무가내식 의료 개혁에 전국에서 많은 전문의가 사직서를 냈고, 건대충주병원도 응급실 전문의 전원이 가운을 벗었다. 24시간 응급실이라고는 충주의료원과 건대충주병원, 두 곳밖에 없는 충주로써는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지역 응급의료의 붕괴였다.
다행히 일부 전문의가 복귀하면서 10월부터 응급실이 정상 운영되고 있지만 업무 과중과 스트레스로 언제 또 유사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어떤 정책을 시행할 때는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예상 가능한 갈등을 조율하면서 적정선을 찾아가야 하는데 이 정권은 불도저다. 차안대를 낀 경주마다. 그래서 위험하다.
쓰다 보니 흥분해서 말이 샜다. 접수부터, 문진, 치료의 모든 과정이 너무 친절하고 수월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의료진의 모습에 주책스럽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마웠다.
수액이 몸속에 퍼지자 마치 꾀병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가려움이 사라졌다.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자니 의사 선생님이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봤고, 내 질문에도 답해 줬다.
우리 같은 일반 직장인들이야 일과 중에도 중간중간 커피 한 잔 하고 담배 한 대 피우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지만 수시로 환자가 오가는 응급실의 의료진들은 교대 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환자를 상대해야 한다 생각하니, 내 앞에 있는 의사 선생님이 더욱 위대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인사를 건네고 현 정부의 의료 개혁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다소 피곤해 보여서 입을 다물었다(아내도 잘했다고 칭찬했다).
이렇게 가끔씩 아플 때마다 돈이니, 성공이니, 사회적 명성이니 떠들어대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건강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가려움이 이토록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수액을 끝내고 수납 후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가려는데, 큰 딸이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녀석... 아빠가 걱정되긴 했나 보네'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데 전화기 너머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우리 게임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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