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연배라면 알겠지만 1997년, 가수 이적과 김동률은 '카니발'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했다. 아쉽게도 동명의 앨범 한 장만을 남기고 활동을 종료했지만 앨범 속 명곡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97학번인 나는 대학 생활의 시작을 카니발과 함께했다.
거 왜 어떤 노래를 들으면 특정 시절의 장면과 풍경들이 떠오르는 경험, 대부분이 있을 거다. 나에겐 카니발의 노래들이 그렇다. 아마도 스무 살의 시작, 그리고 처음으로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낯선 공간에 터를 잡으며 느꼈을 설렘과 긴장감이 함께해서가 아닐까.
카니발의 노래와 떠오르는 장면들을 몇 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 그땐 그랬지
이제 겨우 스무 살밖에 안 된 나이였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중고등 시절을 추억하곤 했다. 중학교 때의 첫사랑과 고3 수험생 시절의 치열함 등등.
특히, '시린 겨울 맘 졸이던 합격자 발표날에 부둥켜안고서~♬ 이제는 고생 끝 행복이다 내 세상이 왔다 그땐 그랬지~♪' 이 부분은 갓 대학에 입학한 스무 살 청춘에겐 그 어느 가사보다 현실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사오 년 전을 추억하며 따라 불렀던 건데, 이제는 20여 년 전의 이십 대 청춘을 곱씹으며 부르고 있으니 당시의 청승이 가소로울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4ND4XT_QGk
♬ 그녀를 잡아요
대학교 1학년 시절을 함께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같은 과 동기로 들어온 여자아이를 홀로 좋아하며 가슴앓이했는데 그 역시 나처럼 카니발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중에도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가사의 이 노래를 애정했다.
'다시 한번 주저하면 그땐 이미 늦어요~♪ (중략) 그녀를 만나요. 그리고 손을 잡아요. 떨리는 숨결로 마음을 전해요~♬'
이 곡은 그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주며 최면을 걸었고 마침내 노래 가사처럼 그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거절했고, 둘은 고백 전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한동안 그는 술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 친구의 행동은 반면교사가 되어 그후로 난 고백이라는 행위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이건 너무하잖아!)
https://www.youtube.com/watch?v=ksSMiMU89lw
♬ 농담
이 곡은 상대방이 아무 의미 없이, 농담처럼 뱉은 말을 곡해, 확대 해석 혹은 그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가 결국 상처만 남아버린 이의 모습을 참으로 처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그 모습이 한심스레 보일 수도 있지만, 기실 우리는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기에 언제든 누구나 이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청춘 남녀 사이의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수줍음 후많고 의미 부여하는 게 특기였던 그 시절의 나에게 이 노래는 위로였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였다.
'누굴 탓할까요. 내가 바보였죠~♬ 그냥 흘러가는 말에 휩쓸려 버렸죠~'
노래 가사처럼 누굴 탓하겠는가. 내가 바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휩쓸리지 않기 위해 더욱 장벽을 치며 방어했다. 물론 지나고 보니 너무 방어만 한 것 또한 문제였다. 이처럼 뭐 하나 쉽지 않은 게 인생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BAaZByU0Rc
♬ 거위의 꿈
두말이 필요 없는 명곡이다. 2005년에 가수 인순이가 커버곡으로 부르며 대히트를 쳤는데, 이로 인해 거위의 꿈이 인순이의 노래로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적이 작사하고 김동률이 작곡한 명실상부한 카니발의 곡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2004년 장위동의 반지하 자취방이 떠오른다. 그해 졸업을 하고 백수 생활을 이어 갔던 장위동 반지하 자취방. 그 처절한 지지리 궁상의 시기에 거위의 꿈은 위로였고 희망 고문이었다.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에게 이만한 위로의 말이 또 있을까. 거위의 꿈 덕분인지 PD를 꿈꾸던 청년은 2024년 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딱 1년의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지역방송에 입사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바라던 취업을 했음에도 얼큰하게 한잔하고 입사 동기 녀석과 노래방에 갈 때면 여전히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핏대 올리며 불러 댔다.
왜일까.
아직 지역에 대한 이해가 없고 그 가치를 모르던 청춘들은 막연하게 더 크고 넓은 무대를 동경했던 것 같다.
지금도 둘이 노래방에 갈 때면 예외 없이 거위의 꿈을 부른다. 하지만 그 의미와 이유는 예전과 다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1gGBdCkFX8
음악은 예술이고 위로이며 추억이다. 글을 쓰며 지나온 청춘의 순간들을 주욱 훑어본 기분이다.
그 시절, 카니발이 함께해서 고맙고 카니발의 노래로 그때를 추억할 수 있어 행복하다. 오늘의 취침 곡은 카니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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