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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휴업과 선물

by Kang.P 2020.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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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은 거 설거지하면 선물 줄게."

 

어제 저녁, 비염이 심해져 코를 휴지로 막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아내가 말했다.

 

"내가 언제 선물 줘야만 설거지했냐? 뭔데, 선물이?"

"설거지나 하고 이야기해."

 

뭔진 모르겠지만 그깟 선물 따위 때문에 설거지를 한다는 건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채 수세미로 접시를 문질렀다. 저녁을 간단하게 먹었더니 설거짓거리가 많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자, 이제 약속대로 선물을 내놔라'는 표정으로 아내를 응시하고 있자니, 이 사람이 밀땅을 시작했다.

 

선물 때문에 설거지를 한 게 아니니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쿨한 자세를 취하고 싶었지만, 이미 몸은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들 색칠놀이 할 것을 뽑아준 후, 패잔병처럼 소파에 누워 있는데 아내가 무심한 척 이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사실 선물이라는 말에 '빵이나 하나 던져 주겠지' 생각했는데 뜻밖의 상자에 깜짝 놀랐다. 

 

애플워치였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것이 예상보다 일찍 배송되어 미리 주는 생일 선물이란다. 애플워치를 갖고 싶다고 한 적은 없는데, 일전에 시흥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갔을 때, 그 친구의 스마트워치를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나 보다. 

 

전업주부인 아내에게 따로 돈 생길 구멍이 없을텐데 무슨 돈으로 이 비싼 걸 샀냐고 묻자, 가끔 주는 생활비를 모아 샀단다. 휴업이 시행되고 월급이 20% 이상 줄면서 현금으로 생활비를 주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대부분 카드로 필요한 것 사라는 식이었다) 이런 비싼 선물을 받으니 고맙고 미안했다. 

 

그렇게 내 손목에 애플위치가 채워졌다. 좀 오래 앉아 있다 싶으면 움직이라고 시계가 주인을 재촉하고, 나 역시 칼로리 소비 목표치에 얼마나 도달했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움직이게 된다. 이건 마치 기계에 조종당하는 느낌이지만, 운동에 대한 동기 부여만은 확실하다. 

 

사실 애플워치가 생겼다는 기쁨도 있지만 그보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더 크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우리 역시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 우리를 위해 뭔가를 사는 행위가 현저히 줄었다. 특히 아내가 그렇다. 필요한 거 있으면 사라고 하면 '집에만 있는데, 뭐...' 하며 거절하기 일쑤다. 그럴 때면 내 어릴 적 울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결론은, 다음 달에 있는 아내 생일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거다(응?).

 

 

시계 하나로 일상생활에 다소 변화가 생길 것 같다. 무수히 실패했던 금연에 대한 재도전 욕구 역시 애플워치의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일 것이다(얼마나 오래 참느냐가 문제지만 말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왼쪽 손목에서 '너무 앉아만 있었다'며 일어나서 좀 움직이란다. 이건 마치 아내의 잔소리와 같아서 무시하고 앉아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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