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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휴업과 이십 년 전 알바

by Kang.P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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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휴업이 4개월 차로 접어들면서 시간 활용의 요령이 생기고 독서와 사색이 습관화되어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는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꾀죄죄한 몰골로 소파에 드러누워 전형적인 카우치 포테이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잘 보지 않던 TV 프로그램들도 접하게 되는데 며칠 전 '나 혼자 산다' 손담비 편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둘러보는 장면이 나왔다. 그녀는 한 웨딩홀 앞을 지나며 과거 이곳에서 예도 알바를 했었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복학 후 시작했던 예식장 촬영 알바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과 선배 형의 소개로 장한평의 한 웨딩홀에서 촬영 알바를 시작했는데 수입이 나쁘지 않았다. 20년 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예식은 3만 원, 고희와 환갑은 5만 원이었던 것 같다(예식은 길면 1시간, 고희나 환갑은 최소 3시간에서 5시간까지 찍어야 했다).

 

결혼 성수기 시즌이면 주말에 이틀 일하고 2~30만 원 정도 벌 수 있는, 당시로는 고부가 알바였다(물론 앉아서 돈 버는 사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주머니 두둑하게 퇴근할 때면 장위동 자취방 인근의 선후배 동료들을 불러 모아 잔치 아닌 잔치를 벌였다. 그렇게 막 써도 될 정도로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는데, 다들 어렵게 자취하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바비의 셈법이 독특했다. 예식을 하나 촬영하면 3만 원인데, 두 개를 하면 6만 원이 아니고 5만 원이다. 즉 하루에 촬영하는 예식 수가 늘 때마다 3만 원이 추가되는 게 아니라 2만 원씩 늘어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똑같이 2개의 예식을 촬영해도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하나씩 촬영하면 6만 원인데 반해, 같은 날에 두 개를 촬영하면 5만 원이다. 고약한 셈법이지만 다른 곳도 다 그렇다고 하기에, 이 바닥은 원래 그런 줄 알고 수긍했다. 

 

잠깐 다른 곳에서 일한 적도 있었는데, 그곳은 당시 프랜차이즈 웨딩 촬영 업체 중 꽤나 유명한 곳으로 전국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본인의 촬영 스케줄과 상관없이 무조건 아침 일찍(오전 8시였나 그랬다) 사무실에 나와야 했다. 그리고는 폐백상에 올라갈 대추에 잣을 찔러 넣어야 한다. 

 

상 위에 있는 저 대추밤고임... 바로 저기에 올라갈 대추에 잣을 끼우는 것이다.

그때는 첫 예식이 촬영 잡힌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 남은 이들은 촬영할 예식 전까지 하염없이 대추에 잣을 끼워대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너무도 쉽게 젊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형태였다.

 

예식장이라는 공간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많은 외부 인력(알바)이 필요하다. 촬영뿐만 아니라 예도, 피로연장 서빙, 주차 관리 등 예식장은 이런 비정규직 알바생들에 의해 굴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한 셈법으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했고 업무 외적인 일도 해야 했다. 문제 제기라도 할라치면 '너 말고도 할 사람 많으니 그만두라'는 분위기여서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비단 예식장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손담비의 일상을 보며 이십 년 전 촬영 알바 때를 추억하며 웃음 지었는데,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아닌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이상 입고리를 올리고 있을 수 없었다. 부디 이십 년 전보다는 처우와 여건이 개선되었길 바란다.

 

TV에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과로사한 택배 기사 소식을 전하는 기자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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