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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휴업과 개나리 원룸

by Kang.P 2020.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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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업으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새롭게 택지 개발해 지어진 곳인데,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는 3층짜리 노란색 건물 3동이 있다. '개나리 원룸'이란 이름도 건물 색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곳은 충주로 내려온 후 두 번째로 터를 잡았던 곳이다. 정확한 평수는 모르는데, 10평이 안 되는 공간에 방 하나와 복도 겸 주방, 그리고 화장실이 딸린, 말 그대로 원룸이다. 외관은 허름해 보이지만, 내부는 깔끔했다(전에 쓰던 사람이 깨끗하게 써서 더 그랬다).

내 방에서 창문을 열면 바로 건국대학교 축산과 실습장이 보이는데, 말이 실습장이지 젖소들을 방목시키는 목초지다. 덕분에 가끔 비몽사몽 일어나 창문을 열 때면 대관령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주변에 슈퍼가 없어서 차가 없던 시절에는 1.3km를 걸어가 담배를 사 와야 했던 외진 곳이다.

작은 원룸이지만, 이곳은 내 서른 살의 추억들이 아로새겨진 곳이다. 친구들이 충주를 찾을 때면 선택의 여지없이 이곳에서 숙박을 했고, 다음 날 아침이면 '아, 나는 정말 행복한 공간에서 살고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고는 눈 뜨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터미널로 내달렸다(그 시절 나는 청소가 뭔지 몰랐다).

대학 시절 나의 반지하 자취방은 만인의 여인숙이었는데, 직장인이 되어 충주로 내려와서도 유독 이곳에 살던 시기에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늦은 시간까지 음주가무를 즐기고 머리 둘 곳이 없다 싶으면 찾아와, 고성과 함께 부숴버릴 기세로 문을 두드리며 고이 잠든 나를 깨우는 이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만나 술잔 기울일 때면 이때의 추억을 안주 삼는다.

입사 동기도 같은 원룸에 살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오늘 내 방에서 마셨으면 다음 날은 그 녀석 방에서 마실 정도로, 매일같이 술을 마셔댔다. 얼마 안 가 그는 24평 아파트 전세로 옮겼고, 그로부터 한참 후 나는 다시 다른 월세 원룸으로 이사했다. 신기하게도 같은 월급을 받음에도 한 놈은 열심히 부를 축적하는데, 한 놈은 마을을 지키는 아름드리 고목처럼 항상 그 자리였다.

지금이야 웃으며 추억하지만, 사실 그때는 고민도 한숨도 많던 시절이었다. 서른이라는 나이와 미래에 대한 고민, 운 좋게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 됐지만, '과연 나에게 재능이 있는가'하며 비관적인 질문을 던지던 시기였다. 어쩌면 그랬기에 매일같이 술을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개나리 원룸을 나와 다른 원룸으로 이사했지만 우리의 일상은 변함없이 한결같았다. 


이젠 결혼도 하고 사랑하는 아내, 토끼같은 두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렸음에도, 가끔 지지리 궁상 그 시절이 생각난다. 철없이 호기롭기만 한 그때가 부끄럽기도 하고, 연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불가능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한들,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것이지만 말이다(저축은 좀 더 할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시절이 생각나는 건, 젊음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그때의 우리에 대한 그리움' 탓이다. 지금도 생각나면 연락해 안부를 묻고 시간을 쪼개 만나기도 하지만,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처한 상황이 바뀌었고, 고민의 종류와 크기 역시 달라졌기 때문에, 그때의 순수함과 낭만, 열정이 지금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안 되겠다. 그 때처럼 술 한 잔 하고 오랜만에 전화 걸어 그 시절의 추억담을 나눠야겠다.


(역시 오늘도 기-승-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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