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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관심과 행동

by Kang.P 202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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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가 있는 1층으로 이사 오면서 시작한 텃밭의 첫 수확물이 나왔다. 오이 하나와 고추 세 개. 개수는 얼마 안되지만 이것의 의미와 가치는 개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성찬식을 집도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칼로 오이의 껍질을 벗긴다. 손놀림의 실수로 껍질과 함께 두꺼운 오이의 몸통이 함께 잘려나갈 때면, 안타까움에 외마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저녁상(을 가장한 술상)이 완성되었다. 한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이면, 일주일간 고생한 나에게 소주 한 잔 건내고 싶어진다(는 말로 오늘의 음주를 정당화한다). 소주 한 잔과 아내의 동태탕은 환상의 궁합이었고, 국물 안주가 지겨워질 때 즈음에는 오이를 쌈장에 찍어 씹으면 아삭하고 시원한 식감이 술맛, 아니 입맛을 돋웠다. 또한 엄마가 준 모종에서 수확한 고추는 다소 질긴감이 있지만, 적당히 매워서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한 주가 지났고, 살아온 날이 한 주 늘어난 만큼 살아갈 날이 한 주 줄었다. 시간에 대한 지각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 흐름의 속도가 빠르게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바쁘다는 뜻일테고, 사실 내가 요즘 그렇다. 

 

 

"괜찮아요... 다음에요, 다음에..."

 

요즘 자주 듣는 말이다. 이 말은 '지금은 싫고, 다음에 (상황 봐서) 인터뷰에 응하(던지 하)겠다'는, 정중한 거절을 의미한다. 5월 말부터 나는 청주새날학교의 중도입국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이들을 기록하고 있다. 중도입국 청소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한국인과 재혼한 결혼이민자가 데려온 이전 혼인 관계에서 출생한 아이, 한국으로 온 고려인 동포의 자녀, 북한이탈주민의 제3국 출생자녀 등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 준비 과정을 거쳐 한국으로 온 외국인 유학생들과 달리, 이들은 충분한 준비 없이 엄마(혹은 아빠)를 따라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도입국 청소년들의 모습을 담고자 하는데, (예상은 했지만) 아이들의 마음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호의는 고마움보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하는 의구심과 함께 경계의 촉을 세우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우리네 모습이다. 알고 지내는 사이도 이럴진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난 너희들에게 관심이 많단다.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련?" 한다면 나 같아도 마음의 바리케이드를 쳐 버릴 것이다. 관계를 이루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오이 하나와 고추 세 개가 생각났다. 이것들을 수확하기 위해 수확 날짜를 정하고, 수확 전까지 어떻게 할지 꼼꼼하게 계획한 것은 없었다. 그저 수시로 나가 보면서 말랐다 싶으면 물 주고, 덥겠다 싶으면 가지를 쳐 주곤 했더니 어느 순간 실한 과실이 달려 있었다.

 

꾸준한 관심과 필요한 시기의 적절한 행동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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