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편집실 의자에 걸려있던 경량 조끼를 퇴근길에 집어 들었다. 목련이 자태를 뽐낼 때부터 집에 가져가야지 했는데 이제야 실천에 옮긴다. 그냥 뒀다가 돌아오는 겨울에 슬며시 다시 입을까도 생각했지만, 이대로 두 계절을 더 보내면 마치 이 공간과 그 속의 나만 세상과 괴리되어 멈춰 버린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때가 되면 치워야 하는 것이 비단 계절옷만은 아니다. 감정도 그렇다. 깨끗이 세탁 후 잘 정리해 넣어두어야 다시금 필요한 계절이 왔을 때 뽀송뽀송한 상태로 꺼내 입을 수 있는 계절 의류처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 역시 잘 추스르고 정리해 둬야 언젠가 또다시 불쑥 튀어나왔을 때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려면 많은 감정들을 체화해야 하는데 사실 그게 쉽지 않다. 좋은 감정이야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예상되는 불편한 상황과 맞닥뜨릴 때면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려 드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 마음이다. 본능적 비겁함이라고나 할까.
이런 회피와 부정으로 불편한 감정을 거부하고 안락한(?) 감정만 찾다 보면 사고 역시 고착화되기 십상인데, 내가 딱 그런 부류의 인간 군상 중 하나다.
이런 나에게 은유 작가의 신작 <해방의 밤>은 큰 울림과 자성의 시간을 줬다.
도서관 신간 코너를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책인데 표지의 '은유의 책 편지'라는 문구에 끌렸다. 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은유라는 작가를 몰랐다(새로운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다). 그저 '책 편지'라고 하니 독후감이겠거니 생각했고, 읽다 보면 좋은 책을 발견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의 말처럼 '한 사람이 읽은 책을 알려주지만 독후감은 아니'었다. 꼭지마다 책이 소개되곤 있지만, 작가의 일상과 그 속에서 느낀 여러 감정과 생각들을 특정 대상에게 이야기하는, 서간문 형식의 글이다.
작가의 주된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했던) 안락한 감정이 아닌, 다소 불편하고 그래서 외면해 왔던 주제들-가난, 불평등, 비정규직, 여성, 성폭력, 죽음, 성정체성 등을 다룬다. 그럼에도 저돌적이지 않았고 차분한 어조로 작가의 사유를 풀어가는 글들은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되죠'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그 나이를 두번 산다'
'가족이든 학교든 사회든 그 조직의 가장 약한 사람은 많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으니 말을 안 할 뿐'
'글쓰기는 문장 쓰기가 아니라 관점 만들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작가의 문장들은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해방의 밤> 덕분에 은유 작가를 알게 되었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내며 때론 등한시했던 가치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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