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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잠실의 추억

by Kang.P 2023.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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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말인지 2002년 초인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잠실의 날씨는 화창했고 정장 차림의 서울 시티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잰걸음으로 정신없이 내 앞을 오가는데, 그 모습이 역동적이면서도 애처로웠다. 

 

2001년 6월에 제대한 나는 군인과 민간인 사이 그 어디 즈음에 있으면서 재사회화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누군가와 어깨라도 부딪힐라치면 '죄송합니다' 보다 '병장! 강창묵!', 관등 성명이 먼저 튀어나왔고, 말을 못 들었을 땐 '예? 뭐라고요?'라고 되묻지 못하고 '잘 못 들었습니다!'를 외쳤다.

 

그렇게 실수하고 고쳐 가며 복학 전까지 고향인 제천의 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4, 5개월 간의 알바를 끝내고 쉬면서 복학을 준비할 때쯤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녀석은 제대 후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주차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쉬고 있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등록금에 보태야 하지 않겠냐'며 어른처럼 훈계했다. 

 

틀린 말이 아닌 게 상병 때쯤이었을 거다. 아버지가 명퇴를 하셨다. 당시는 어린 나이에 화가 났다. 아직 대학을 2년이나 더 다녀야 하고 동생은 이제 고3인데 이 시기에 명퇴를 하시면 어떡하냐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시멘트 회사에 다니셨는데 복지가 좋아서 두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 줬기 때문이다.

 

'가장이면 그 정도의 희생과 책임감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막상 가장이 되고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철없고 부끄러운 행실이었다(그래서 지금도 죄송하다).  

 

아버지의 명퇴는 이미 결정난 일이었고 그래서 난 조금이라도 등록금과 생활비에 보태기 위한 일을 도모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 녀석이 다시 전화 걸어 알바 구했냐며 다그쳤다. 갑자기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었고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말했다. 

 

또 일장 연설을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녀석의 대꾸는 의외였다.

 

"잘 됐네."

 

'사람을 놀리나' 따지려는데 녀석이 먼저 말을 이었다. 요는 이랬다. 자기와 함께 주차 알바를 하던 친구가 다쳐서 깁스를 하는 바람에 3, 4일 정도 대신할 사람을 급하게 찾는데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정확한 금액을 기억할 수 없지만 일당도 나쁘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조건 '콜!'을 외쳤다. 3, 4일 일하고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고 친구와 같이 일한다고 하니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나는 잠실역 앞에서 서울 시티즌들의 역동성을 애처롭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나타난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눴고 식당으로 이동해 맛있게 술을 마셨다. 내일부터 일을 해야 하니 많이 마시지 말자고 약속했지만, 숙소인 모텔까지 술을 사 들고 갔다. 

 

다음 날 아침. 어차피 오후 근무 투입이라 느지막이 일어나 해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어제 봤던 정장 차림의 인파를 뚫고 찾은 곳은 잠실의 고층 빌딩 앞이었다. 문득 어젯밤 숙소에 녀석이 한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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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너 나 믿지? 그렇지? 나만 믿고 4일만 같이 있어 보자!"

 

그렇게 난 다단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선남선녀가 삼삼오오 모여 있기에 말로만 듣던 단체 미팅 이벤트 같은 것으로 착각했었지만, 벽에 붙어있는 사업자등록증을 보고는 다단계임을 확신했다. 

 

친구가 그토록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4일 정도 같이 못 있어줄 이유가 없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약속한 4일 후에는 당당히 두 발로 걸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누가 앞에 나와서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듣는 척했고, 그게 끝나면 데리고 나가 밥을 사 줬다. 밥을 먹고는 당구도 쳤는데 내가 졌는데 그들이 당구비를 대신 내줬다. 당구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표현하거나 말리지는 않았다. 저녁이 되면 술까지 사 줬으니 이건 마치 대학 새내기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때는 형, 누나들이 밥과 술을 다 사줬다. 나는 그저 맛있게 먹고 마시고 취하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마지막 4일 째가 되었고 친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친구야, 나만 믿고 같이 해보자!"

 

뒤도 안 돌아보고 '아니!!!'라고 외치며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4일 동안 함께 생활하며 '이거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 어딘가로 쑤시고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의 간곡한 부탁이 컸다. 당시 나는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혈기 왕성하고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움직이는 이십 대 중반의 뜨거운 청춘이었기에 친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까짓 거 함 해 보자!"

 

친구뿐만 아니라 같은 조(?)였던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했고 마치 잃어버린 가족이라도 찾은 양 포옹하며 난리를 떨었다. 

 

"근데 말이야, 조건이 있어."

 

나의 이 말 한마디에 마치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티브이 화면처럼 사람들의 동작도 소리도 멈춰버렸고, 따가울 정도로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치악산에 다녀와서 올게."

 

친구와 이곳 사람들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함께 하자고 했으나 나는 다음 주에 이미 잡혀 있었던 치악산 등반을 마친 후 다시금 잠실로 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난색을 표했지만 나 역시 고집을 부렸고 결국 내 뜻대로 하게 되었다. 

 

손가락 걸며 약속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부모님께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기로 했다. 복학 앞두고 미리 서울 올라간다고 하면 될 것 같았고 아직 복학까지 1달 남짓 남았으니 그때 가서 사실을 이야기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있을 무렵, 다단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지?' 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녀석이 제천에 왔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팀의 팀장 정도 되는 사람과 함께... 우리 집 근처에서 술 한 잔 하자고 하길래 그러자며 주소를 알려 줬다. 

 

정신이 돌아온 건 이때였다.

나는 친구를 믿고 손가락까지 걸었고 다만 치악산 등반하고 올테니 기다려 달라 한 건데, 이들은 나를 믿지 못했고 산에 가지 말고 월요일부터 함께하자고 설득하러 온 것이었다. 

 

배신감. 

나에 대한 믿음의 부재. 

맹신에 가까웠던 친구를 향한 나의 믿음이 불쌍하고 처량했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나는, '오늘 이 방문으로 인해 모든 신뢰가 깨졌고 지금 이 순간부터 니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를 믿었다면 오지 말았어야 했다(결과적으로는 감사한 일이었다. 이때 안 왔다면 난 지금쯤 잠실 언저리에... 어후, 생각하기도 싫다).

 

미안하다며,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자며 매달리는 두 사람을 떠밀치고는 차마 사람은 못 때리겠어서 애먼 가게 셔터를 발로 차며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나는 이들 때문에 다단계에 발을 들일 뻔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덕분에 발을 뺄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잠실의 그 다단계 사무실에는 고3 때 우리 반 친구들의 반 이상이 몸 담고 있었다.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도 그들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는 일이지만, 다행인 건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단계에서 나와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며 '나 믿지?'를 남발하던 친구와도 잘 지내고 있고 이 사건도 웃으며 꺼내는 안줏거리가 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잠실 인근에는 다단계가 성황을 이뤘고 그만큼 피해자도 많았다. 그래서 친구 살리겠다며 잠실까지 올라가서 납치하다시피 구출해 오는 사건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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