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동서울관과 서서울관으로 나뉘어 여의도와 중화동에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지만, 라떼의(latte is horse) 충북학사는 6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로, 개포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충북학사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충청북도의 학생들을 위해 도에서 만든 기숙사다. 저렴한 가격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충북의 인재 양성소라 할 수 있는데, 나와는 매우 결이 다른 공간이지만 운 좋게도 군대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처음에 지원했을 때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고향 친구와 함께 외대 앞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있는데 충북학사로부터 ‘TO가 생겼으니 올 테면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숙비의 반도 안 되는 기숙사비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성북역(현 광운대역)에서 도곡역까지 1시간이 넘는 등하굣길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위해서라면 육체의 고단함 따위는 감수해야 했다.
당시의 충북학사는 3인 1실이었고 방짱-방중-방쫄 이라는 암묵적인 계급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이순이었고 나는 2학년에 들어갔기 때문에 바로 방중이 되었다.
20대 청춘의 선남선녀를 모아 놓다 보니 사감 선생님은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학사의 통금시간은 10시 반인가 11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통금 시간 즈음하여 4층 도서관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숨을 헐떡이며 어둠 속을 내달리는 내 모습을 솔찬히 볼 수 있었다.
외박이라도 할라치면 1층 사무실에 외박 사유를 미리 적고 나가야 했다. 행여 예상치 못한 외박 사유가 생겼을 때는 밤 10시 전에 학사로 연락해 줘야 했는데, 그럴 경우 벌점 2점(인지 5점인지 확실하진 않다)이 부과되었고, 무단 외박을 했을 시에는 벌점 10점(인지 20점인지 확실하지 않다)이 주어졌다. 그러다 보니 당시 다양한 목소리의 '502호 강창묵'이 존재했다(인사불성 된 나를 대신해 친구들이 학사로 전화해 외박 통보를 해줬다).
벌점이 100점까지 쌓이면 가차 없이 퇴사였다. 그리고 그 전 단계인 80점이 되면 일정 기간 동안 샤워실 청소를 해야 한다. 나에게 벌점 80점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럭키가이~!!'를 외치게 되는데, 벌점 80점이 되어 샤워실 청소를 해야 하는 찰나에 샤워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고 사감 선생님은 내 어깨를 툭치며 운 좋은 줄 알라고 했다.
당시 학교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던 나는 학사 생활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단순히 벌점이 쌓이는 문제뿐만 아니라 학사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시간이 안 맞아 학사 식당의 이용도 적었으니 학사는 그저 잠자는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부분이 아쉽다.
그럼에도 충북학사는 20대 초반의 추억이 아로새겨진 곳이다. 이성의 동기와 단둘이 영화를 보기로 한 어느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많지도 않은 옷을 이리저리 바꿔 입으며 준비하던 설렘이 함께한 공간이었고, 시간이 지나 그 설렘과 기대를 양재천에 던져버릴 때도 최종 목적지는 충북학사였다. 지금도 '마이클 런스 투 락'의 노래를 들으면 나른한 주말 오후, 502호에 홀로 누워 봄햇살을 만끽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2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와 함께 학사를 떠났다. 미운 정도 무시할 수 없나 보다. 짐을 빼던 날 사감 선생님은 제대하고 복학하면 다시 학사로 오라며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제대 후 나는 충북학사가 아닌 장위동 반지하 자취방에서 친구 2명과 함께 복학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사감 선생님은 나와의 미운 정 때문인지 취직 후에도 한참 동안 학사 소식을 전해주셨다. 이따금씩 개포동의 충북학사가, 도곡역에서 학사를 오가며 만나던 양재천과 주변의 풍경들이, 무엇보다 20대 초반의 풋풋했던 청춘과 무모함이 그립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연락이 끊겼지만 말이다.
https://youtu.be/SIWcOdBtLRw
'가끔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섬집 아기 (0) | 2023.04.29 |
|---|---|
|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잠실의 추억 (0) | 2023.04.07 |
| 책상 정리 (0) | 2021.09.23 |
| 크리스마스이브와 빨간 하이힐 (0) | 2020.12.26 |
| 부치지 못한 편지 (0) | 2014.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