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대기번호 1088번

by Kang.P 2021. 8. 24.
728x90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고 25명이었던 대기 인원은 10명으로 줄었다. 1시간 동안 15명이 줄어든 것이니 1명 당 4분이 소요된 셈인데 기다리다 포기하고 자리를 뜬 이들을 감안하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오랜 기다림은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은행을 찾은 내 탓이다. OTP의 만기일이 다가와서 오랜만에 은행을 찾은 건데, 아무리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금융 업무를 볼 수 있다고 해도 은행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사람들로 분주했다.

잠깐 일 보고 들어갈 요량이었지만 대기 시간만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다.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뭐 읽을 거 없나 폰을 뒤지다가 오래전 친구가 선물해 준 e북이 눈에 들어왔다.

김재완 작가의 ‘나 아직 안 죽었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인데 40페이지 즈음에 책갈피가 꽂혀있었다.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후미진 구석 자리에 앉아 책갈피 꽂은 부분부터 읽어 내려갔는데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글을 읽다 보니 당연한 수순으로 우리 아빠 엄마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릴 적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밥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는 작가의 아버지와 가족들 끼니 챙기느라 한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의 이야기는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끼니보다 집에 대한 집착이 크시다. 집착이라기보다는 집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부동산 투자나 매매를 통한 수익 창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 고유의 가치, 의식주에서 '주'에 해당하는 근본적인 집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이유는 아버지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는데, 아버지는 한창 예민한 학창 시절을 친척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인근 도시로 진학하게 되면서 집에서 등하교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자취나 하숙을 시켜 줄 돈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인근에 살고 있는 친척 집에서 생활하게 된 것인데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눈치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고, 뭐라도 집안일을 도와야(산에서 나무 해 오는 등) 방 하나 쓰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 이런 경험이 아버지로 하여금 집에 대한 강한 집념을 만들지 않았을까.

728x90


내 어린 시절을 돌아봐도 집의 의미는 남다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회사의 관사에서 살았다. 지하실이 있는 단독 주택이었고 방 하나는 월세를 주며 부수입까지 창출하는 매우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삼촌의 사업이 실패하게 되는데 그 여파는 고스란히 보증을 선 아버지에게로 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사글세 단칸방을 시작으로 산 밑자락 조그마한 땅에 비늘하우스를 짓고 살기도 했고, 상황이 좀 나아져서는 남의 집 2층에서 전세로 살았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우리는 아버지가 퇴직금으로 시골에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면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는데, 그때가 내 나이 이십 대 중반이었다.

아버지는 마당에 신경을 많이 쓰셨는데 과거 분재원을 하셨던 경력을 살려 나무와 조경을 이쁘게 꾸며 놓으셨는데, 이곳이 지금은 손녀들의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새삼 우리 아버지가 젊어서 고생 많이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삼겹살이라도 사 들고 고향집을 찾아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거리는 사이 띵동하는 울림과 함께 1085이라는 숫자가 깜박인다. 내 대기 번호는 1088번. 이제 2명 남았다. 할 일 많은 월요일 오후를 이렇게 보내는 게 아쉽지만 덕분에 주말 스케줄을 잡을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반응형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상 정리  (0) 2021.09.23
백신 접종  (0) 2021.08.27
관장  (0) 2021.08.11
여름휴가의 끝  (0) 2021.08.08
시간  (0) 2021.07.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