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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시기의 중요성

by Kang.P 2019.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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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처럼 (사실 아저씨다.) 키홀더를 허리띠에 차고 다닌 게 문제였다. 그러던 중 뾰족한 부분이 운전석 가죽시트를 찢어버렸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타고 다녔으나, 찢어진 부위가 점점 벌어지고 나서야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구상하던 중, 파이프가 깨져서 물이 새는 것도 한 번에 붙여버리는 테이프 광고가 홈쇼핑에서 나왔고, 저거다 싶어 바로 호갱이 되었다. 확실히 일반 전기 테이프와는 달랐지만, 여름철 뜨거운 실내 온도에 접착 성분이 녹아내려 끈적해지기 일쑤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다 충주의 복원업체를 알아내 찾아갔는데 복원은 할 수 있지만, 마찰이 많은 위치라 언제까지 붙어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해 줬다. 조언 고마웠고 좀 더 생각해 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나온 김에 그동안 미뤄왔던 블랙박스를 교체하러 갔다.

블랙박스가 멈춘 지는 대략 6개월이 넘은 것 같다. ‘뭐 사고 날 일이 있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냥 다녔는데, 왠지 오늘은 교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사고 처음 블랙박스를 설치했던 가게를 찾았는데, 엄청 친절한 분으로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전 주인이 불친절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더 친절했다는 뜻일 뿐). 보편적으로 많이 쓴다는 블랙박스 제품을 선택했고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는 말이 생각났다.) 사장님은 금방 설치를 마쳤다.

문제는 내비게이션 업데이트였다. 지금 쓰고 있는 내비게이션은 2014년에 차를 사고 한 번도 업데이트를 안 했다. 핑계를 대자면, 사제 내비게이션을 설치했더니 라디오 화면과 내비게이션을 같이 쓰려면 업데이트할 때, 특정 파일을 빼놨다가 업데이트 후 다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기계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사장님이 설명을 해줘도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손놓고 있었던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업데이트 양은 방대했다. 업데이트를 시작하며 사장님은 “허허, 이거 못해도 40분은 잡아야 할 것 같은데요. 시간 괜찮으세요?”하며 물어 왔고, 어차피 작정하고 나온 거라 “예, 괜찮습니다.”라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이미 블랙박스 설치를 마친 사장님은 옆자리의 흰색 코란도 스포츠를 (특별히 할 건 없어 보였지만, 그냥 있기는 뭐했는지) 툭툭 건드리고 계셨고, 나는 도서관에 빌려온 (최애하는) 최민석 작가님의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꺼내 읽었지만, TV의 뉴스 속보 소리가 너무 커서 집중할 수 없었다(부디 헝가리 유람선 사고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길 기도합니다).

업데이트 상태를 확인한 사장님은 “허허, 이거 40분 가지고 될 일 아닌데요, 한참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하며 물어왔고 나는 “5년 만에 하는 건데, 오래 걸리겠죠. 괜찮습니다.”라고 대꾸했다. 또 수 십 분이 흘러 사장님과 나는 같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한 달이면 없던 길이 뚫리고 건물이 올라가는 요즘 세상인데, 5년 간 그 많은 변화들을 외면했으니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금은 귀찮더라도 그때그때 처리했다면 이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시기를 놓쳐서 문제가 되는 건 비단 내비게이션 업데이트만이 아니다. 생각났을 때 혹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바로 조치를 취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내일로 모레로 미루다 일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적어도 나에게는) 많다. 변명의 여지없는 우유부단함과 게으름의 결과물이다.

시기가 중요한 게 어디 이 뿐이랴.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문득 누군가가 생각나거나 갑자기 아무개가 궁금할 때가 적잖게 있는데, 그때마다 나중으로 미루다 결국 연락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시기에 이른 적이 많다. 이 또한 게으름과 소심한 성격 탓이겠지만 쉬이 고쳐지지 않는다. 성격이 그렇다면 결국 노력이 필요하다.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요즘인데, 한 시간 넘게 내비게이션 업데이트를 기다리며 관계도 결국은 시기와 노력의 문제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개똥철학에 빠져 있는 나를 깨운 것은 친절한 사장님이었다. 한 시간이 넘었는데 이제 겨우 반 밖에 진행이 안 됐으니, 기다리지 말고 퇴근 시간에 다시 오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시간 낭비였고, 무엇보다 사장님도 잠시 어딜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지만, 통화 내용을 통해) 알고 있었다. 

퇴근길에 들르니 다행히 업데이트는 끝나 있었다. 이로써 몇 년 만에 블랙박스와 내비게이션이 모두 작동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시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고, 관계에서의 시기도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이제 내 차도 요철을 넘거나 급커브를 돌 때 '삐'하는 기분 좋은 경보음이 들려온다.

블랙박스가 잘 돌아가니, 뭔가 보호받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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