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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아버지의 편지

by Kang.P 2019.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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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엄마가 집주소를 물어볼 때 좀 이상하다 싶었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아니 뭐 그냥...’ 얼버무리시며 정확한 이유를 이야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내는 “그렇게 눈치가 없냐”며(사실은 ‘인간아’로 시작하는 좀더 심한 문장을 구사했다.) “아버님이 편지 보내시려나 보다”라고 예측했다. 듣고 보니 요즘 아빠가 교회에서 하는 아버지 학교에 다니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났다.

그러곤 잊고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에 퇴근하고 보니 정말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아내의 예상대로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사실 그날 직장 동료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술 취하면 평소의 50배 이상 감성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비단 나만 가지고 있는 질병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군대 있을 때 빼고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받아보는 편지였고, 그 속에는 평소 당신께서 미처 말씀하시지 못하셨던 속마음이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신데, 장문의 글 속에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고, 그 모습이 혈중 알코올 농도만큼이나 풍부해진 감수성과 만나니 결국 눈물샘을 폭발시킨 것이다.

휴지 반 통을 쓰고 나서야 편지를 다 읽을 수 있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흘린 눈물은 학창 시절을 지나 어쩌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앙금이 녹아서 눈물의 형태로 흐른 것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편지 속 아버지의 후회와 반성이 두 딸의 아빠인 나에게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이 편지를 받았다면, 지금과 같은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아버지라는 위치에 있다 보니, 내 아버지의 후회와 반성이 더 크게 다가왔고 아울러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트라우마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유년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이런 표현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아버지가 되고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내 아이들도 아빠인 나의 모습에서 같은 감정을 쌓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자식을 낳으면 우리 아버지처럼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는데 은연중에 그렇게 싫어했던 모습이 내게서 나오고, 때로는 훈육이란 이름으로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나를 봤기 때문이다.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만큼 아빠로 엄마로 사는 것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힘들고 정답 또한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조만간 삼겹살과 소주 사들고 고향집을 찾아야겠다. 수줍은 답장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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