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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라면 예찬

by Kang.P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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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아침에는 오랜만에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줬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 애들도 평소에 라면 노래를 불렀고 여느 부모가 그렇듯 우리 역시 라면에는 야박했다. 그렇지만 주말만큼은 치팅데이!! 찬장에서 라면 2개를 꺼냈다.
 
진라면과 튀김우동라면

같은 라면을 끓여주면 좋을 텐데 두 녀석의 식성이 너무 다르다. 한 아이는 언니랍시고 (순한 맛이긴 하지만) 진라면을 먹고 다른 한 아이는 아직 라면을 매워해서 튀김 우동을 먹는다.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냄비에 두 개의 라면을 따로 끓여야 한다.

 

이 둘은 식성뿐만 아니라 먹성도 다르다.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큰 딸과 면가닥을 세고 앉아있는 둘째를 보고 있노라면 어쩜 이리 다를 수가 있나 싶다.  아이들이 먹는 걸 확인하고는 남은 두 종류의 라면을 한 곳으로 모아 담고 거기에 슬라이스치즈 반쪽을 넣었다. 이게 내 아침인 거다. 

 

눈 비비며 나온 아내가 이 모습을 보고 "개밥도 아니고 라면을 왜 그런 식으로 먹냐"며 혀를 내둘렀다. 아내가 이토록 기겁을 하는 건 그녀는 라면 본연의 맛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나 계란이 들어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순수 라면에 대한 그녀의 집념은 강하다.

 

반면, 나는 라면에 대한 실험 정신이 투철하다(일하는데 이런 투철함이 있었어야 하는데, 아쉽다). 라면 하나를 끓이더라도 다진 마늘부터 떡, 만두, 계란 등 사용 가능한 모든 부재료를 활용하여 나름 '건강한' 라면을 끓여 먹으려 노력한다. 

 

한발 더 나아가 다른 두 종류의 라면을 섞어 먹는 걸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스낵면의 면과 짜파게티 스프를 조합하여 면이 얇은 짜장라면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렇게 조합을 바꿔가다 보면 뜻밖의 맛과 식감을 발견하게 된다. 

 

라면 만드는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연구와 테스트를 통해 최고의 조합을 만들었을 텐데 굳이 너까지 그럴 필요 있느냐,며 (아내처럼) 의아해 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위동 반지하에서 자취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위동 반지하 자취방과 라면

 

제대 후 복학하면서 친구 두 명과 함께 장위동의 방 2개짜리 반지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우리의 동거는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졸업 후에는 취업하는 순서대로 한 명씩 반지하를 떠났는데 결국 나 혼자 남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두 친구는 모두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라 이들과 함께 살 때는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맛있게 먹고 설거지만 책임지면 됐다. 문제는 이들이 떠나고 나서부터였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는 서당개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먹을 줄만 알았지 요리라고는 할 줄 아는 게 1도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라면을 사다 놓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하루 세끼를 모두 라면으로 때운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겨운 라면에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간혹 실패한 조합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괜찮은 조합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스낵면과 짜파게티의 콜라보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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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즉통, 살기 위한 몸부림

 

요리는 할 줄 모르고 매일 먹는 라면은 지겨운 상황에서 고안한, 나름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라면 이야기를 하니 또하나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웨딩 촬영 알바를 하곤 있었지만 아무래도 백수다 보니 돈이 똑 떨어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종이컵에 모아둔 동전을 추려서 라면을 사 오곤 했는데, 이런 날은 지척에 편의점이 있음에도 골목을 한참 들어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을 샀다. 

 

백수도 사람인지라 편의점 알바 중인 청순한 여학생 앞에서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 금액에 맞게 헤아려 내미는 게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다. 좀더 걷더라도 구멍가게 할머니 앞에서 손가락 튕기며 동전을 세는 게 덜 부끄러웠다. 할머니도 이런 내가 측은했는지 가끔 뭔가를 손에 쥐어주곤 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 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낭만은 있던 시절이다. 모두가 힘들다 보니 서로 챙기는 인간미와 의리가 있었다. 그 시절이 벌써 20년 전이라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란다. 여전히 생생하고 말 한마디까지 기억나는데 너무 오래된 과거가 되어 버렸다. 아쉽고 그립다. 

 

 

그럼에도, 라면!!

 

1년의 백수 생활 동안 이 정도로 먹어댔으면 이젠 질릴 법도 한데 여전히 라면은 최애 음식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짜장면).

 

조리 시간이 짧아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좋고, 종류도 다양해 그날의 기분과 날씨에 맞게 골라 먹을 수 있어 좋다. 또한 이도 성에 안 찰 때는 직접 섞어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 먹는 재미도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음식이 또 있겠는가.

 

애들한테는 못 먹게 하면서 아빠는 이리 라면 예찬을 하고 있으니 미안하긴 하다만 너희들도 내 나이 되면 알 거다~ㅎㅎㅎ

 

면사랑은 충주에서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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