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나는 단지 로또를 사고 싶었을 뿐이었다.

by Kang.P 2022. 9. 9.
728x90

지갑을 뒤적이다 로또 한 장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지난 대부도 여행 때 로또를 샀었고 5천 원짜리에 당첨되었던 게 생각났다(그날 같이 산 선배 형은 5만 원과 5천 원에 당첨됐다). 때마침 명절 앞두고 일찍 충주로 넘어와 몇몇 분께 명절 인사를 드린 후라 기분 좋게 '로또나 한 번 할까' 하며 로또 판매점을 향했다.

자주 가는 로또 판매점 앞에 차를 세우고 가게 문을 여는데, 어라? 잠겨있네? 양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안을 들여다보니, 어서 너의 행운을 잡으라는 듯 두툼한 로또 용지 다발과 OMR용 사인펜들이 손짓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으니 도리가 없었다. 오래 기다릴 마음은 없었기에, '다음에 하지 뭐.' 하며 몸을 돌렸는데 옆 가게 평상에 앉아계시던 어르신 두 분이 손가락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 오네, 저 와~' 하며 가지 말라는 듯 나를 노려보셨다.

나를 발견한 로또 사장님은 당황한 듯 횡단보도를 건너셨는데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일반인이라면 한걸음에 건너올 편도 2차선 도로를, 가게 사장님은 급한 마음과 달리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조심조심 내 쪽으로 오고 계셨다.

어찌 되었건 이제 로또를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사장님은 잠긴 문을 여는 대신 나를 보며 '농협에 가서 돈을 입금해야 로또 기계가 돌아가는데 돈을 넣지 못해서 안 된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로또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사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았다.
"미안한데, 농협까지만 태워다 주면 안 될까요? 문 닫을 시간 다 됐는데, 택시가 안 잡혀서 못 가고 있어요."
내가 뭘 잘 못 들었나 싶었다. 이 상황에서 거절한다고 해도 나를 탓할 사람은 없었다. 다소 황당한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간, 안절부절못하는 사장님의 모습과 함께 바깥쪽으로 휜 그의 오른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반응형

"타세요. 어차피 저도 그 쪽 방향이에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얀 거짓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집 바로 앞에 농협이 있다. 사장님을 옆에 태우고 농협으로 향했다.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장님이 말한 농협과 내가 이해한 농협이 같은 곳이 아님을 알아차리는데는... 갓길에 차를 대고 어느 동네 농협인지 정확히 말씀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마음이 급하셨는지 설명은 없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만 반복하고 계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제가 무슨 택시기사도 아니고..."
"아... 미안합니다. 저기 왜 ○○동 쪽으로 가시다 보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다시 핸들을 돌리려는데, 사장님이 미안하다며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의 짜증을 대가의 요구로 이해하셨나 보다. 얼굴이 붉어지며 완강히 거절했다. 내 행위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호의였지 금전적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 무심코 튀어나온 짜증 섞인 언행이 부끄러웠다.

다행히 문 닫기 전에 농협에 도착했고, 연신 고맙다는 사장님을 내려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착한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집 앞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데 자꾸 뭔가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자극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수석 크로스백 밑에 웬 금속 물체가 보였고 '이게 뭐지' 하며 집어 보니 키홀더였다. 거기엔 자동차 스마트 키와 함께 두 개의 열쇠가 달려 있었다.

'아하...'

추론컨대, 급하게 내리던 로또 사장님이 흘린 열쇠 꾸러미일 것이고, 저 열쇠 중 하나는 로또 가게의 열쇠일 것이다. 즉, 농협에 돈을 입금해서 로또 기계가 순조롭게 돌아간다고 해도 가게 문을 못 여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사장님은 내 핸드폰 번호를, 나 역시 사장님의 번호를 모르기에 우린 서로 연락할 방법조차 없다.

'사장님... 정말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흑흑'

다시 차를 돌렸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어려움에 처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이야기한 성경 구절은 본 것 같다. 농협 앞에 차를 대고 급히 뛰어가 보니 이미 문을 닫았다. 다시 시동을 걸고 우리 인연의 시작점인 로또 대리점으로 향했다.

그 사이 평상에 앉아 '저기 오네' 하며 사장님과 나를 연결해 주어 지금에 이르게 해 준 어르신들은 이미 자리를 비우셨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로또 가게에는 여전히 사람의 인기척이 없었다. '아... 도대체 어디 계신 거지...' 하며 난감해하고 있는 그때, 택시 한 대가 건너편에 멈추고 손님이 내렸다. 그리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 몸짓이 눈에 익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 가게 앞에 도착한 사장님께 '사장님, 이거 놓고 내리셨어요.' 하며 열쇠 꾸러미을 건넸다. 정신이 없던 사장님은 그때까지도 열쇠를 놓고 내린 걸 모르고 계셨다. 열쇠를 받으며, 사장님은 오늘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을 또 내뱉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니예요. 수고하세요."

그렇게 헤어지고 시동을 거는데, '가만, 내가 애초에 여길 왜 왔었지? 맞다, 로또!' 그렇다. 난 로또를 하러 여기에 왔었고, 이제야 로또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차에서 내려 아까는 잠겨있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님, 오천 원 어치만 주세요."



PS.
잠깐...
아까 키홀더에 분명 자동차 키가 있었는데...
아니 사장님, 근데 왜 저한테,,,


 

반응형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흔다섯 살에 맞이하는 마흔네 번째 생일  (0) 2022.10.24
관계의 힘  (0) 2022.10.06
지방종 제거 수술 D+14  (2) 2022.08.24
지방종을 보내며...  (2) 2022.08.13
대부도, 사람을 만나다.  (0) 2022.08.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