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좋았다. 매끼 밥상 차리는 것도 일일뿐더러 특별히 새해 첫날이고 하니 동네 식당에서 외식을 하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고 몇 번 기웃거렸지만 매번 자리가 없어서 포기했던 동네 식당을 찾았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다소 이른 시간이라 다행히 식당은 한산했다.
이 가게의 주메뉴는 돼지김치구이인데, 우리 같은 가족 손님에 대한 배려인지 (어울리진 않지만) 돈까스도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먹기 딱 좋았다. 2024년도 잘 살아보자며 소주와 맥주도 시켰다. 소주 한 병에 맥주 세 병이면 소맥 한 세트가 완성되는데, 항상 마지막 맥주병이 바닥날 때쯤이면 서로 눈치를 보며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은 다음과 같다.
1. 여기서 끝낸다
2. 한 세트(소주 1병 + 맥주 3병)만 더 먹는다
3. 맥주를 2병만 시키고 남는 소주는 두고 일어난다
우리는 3번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시나브로 내 머릿속 지우개가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고, 맥주를 더 시켜 결국 한 세트를 채웠는지, 아니면 약속대로 맥주 두 병까지만 먹고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창피해서 아내에게 안 물어볼 거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건 술자리에서 나왔던 친구 녀석과 선배 형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는데, 대화가 깊어지면서 물 마시 듯 술을 털어 넣었던 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깊다고 느껴지고 소위 '내 사람'이라 여겨지면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데, 나와 달리 상대방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면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게 또한 사람 마음이다. 내가 많이 그런 편이다. 대인관계가 넓지 못하고, 좁고 깊은 편이다 보니 그만큼 기대 심리도 크기 때문일 거다.
이처럼 관계에 대한 깊이가 서로 다르면 의도치 않게 한쪽이 상대방에게 질척거리는 꼴이 될 수 있고 그로 인한 부담감은 거리 두기로 이어질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많은 인간관계가 이런 과정 속에서 정리되고 또 형성되는 것이리라.
앞서 말한 친구와 선배형과의 관계가 위와 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에 대한 근황과 그들의 2024년을 응원하다 보니 대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커져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2024년 한 해도 잘 살아 보자며 마련한 외식으로 인해 새해 첫 출근부터 힘들고 침울했다. 숙취로 인해 육신이 힘들다 보니 생각도 긍정적일 수 없었다(물론 끄물끄물한 날씨도 한몫했다).
과유불급.
진리의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한 법이다.
술도, 사람 관계도 예외 없이 말이다.
'일상다반사 > 2021년~2025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점심 후 산책 (2) | 2024.01.22 |
---|---|
시루섬, 기적의 그날 (4) | 2024.01.14 |
2024년 갑진년, 반갑다 (1) | 2024.01.01 |
새벽 6시 13분 대전행 첫 기차 (1) | 2023.12.11 |
천 원짜리 샤프 (0) | 2023.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