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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휴업과 밀리터리 버거

by Kang.P 2020.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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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리아의 밀리터리 버거 (식판에 나온다)

롯데리아에서 밀리터리 버거가 나온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무릎을 탁 쳤다. 대한민국 보통의 남성들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군대, 그리고 그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일주일에 한 번씩 먹어야 했던 군대리아... 맛을 떠나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버거가 나온다면 한 번쯤은 사 먹지 않을까?

 

한편에서는 남성 위주의 군대 문화이고, 지금도 변함없이 열악한 군대의 식문화를, 과거라는 이유로 낭만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던데, 햄버거 가게의 (언제 단품 될지 모를) 신메뉴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다.

 

생전 처음으로 11번가에서 밀리터리 버거 사전 구매 쿠폰을 샀다. 6,400원 하는 것을 4,300원에 살 수 있으니 30%가 넘는 할인 아닌가. 일찌감치 추석 전에 쿠폰 2장을 구입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못 가고 있다가 휴업 날에 매장에 들려 포장해 왔다. 

 

우리 때는 패티만 있었지, 저런 슬라이스 햄 같은 건 없었다. 

맛은 여느 기본 햄버거와 비슷했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고 맛있게 먹었다. 본인이 먹고 싶은 재료로 직접 만드는 행위가 놀이처럼 느껴졌을 테고, 당연히 좋아하는 것만 골라 넣었으니 맛이 없으면 이상한 일일 테다. 빵을 찍어 먹을 수프가 없고 우유가 아닌 콜라와 함께 해야하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여담이지만, 군대에서 FTC(전투공병 야외훈련) 때 점심으로 햄버거 13개를 먹어 치웠던 기억이 난다. 

 

치열했던 20대 초반 그 시절을 추억할 뿐, 다시 군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은 1도 없을뿐더러, 그런 상명하복식 집단주의 생활은 원치도 않는다. 

 

나는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66사단 공병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당시는 1학년을 마치면 군대 가는 게 추세였는데, 나는 2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보니 아버지들(나와 같은 월에 입사한 1년 선임을 이르는 말) 대부분이 나와 동갑이었고, 99년 4월 군번 동기들은 나를 포함해 4명이었다. 한 명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두 명은 지금도 연락 주고받으며 수년에 한 번 정도는 만나는 것 같다.

 

수송부에서 동기들과 함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나)

 

모두가 그랬겠지만, 26개월의 군생활은 치열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소속되어 버린 조직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형성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고통이었다. 나보다 일주일 먼저 입대한 대학 친구와 주고받는 군사 우편과 자판기 커피와 담배를 양손에 나눠 들고 나누는 동기와의 대화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등화관제와 일석점호, 취침 소등을 마친 후 모포를 뒤집어쓰고 라이트 펜(볼펜 끝부분에 불이 들어와서 어둠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능을 가진 펜)으로 써 내려간 일기장의 사연들은 지금 꺼내 봐도 당시의 절실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수양록이라는 공식적인 일기장이 있었지만, 이것은 항상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일기를 썼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생활이 억압받고 통제되다 보니 반대급부로 시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하루에 주어지는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워드 1급 자격증을 땄고, 처음으로 이문열의 삼국지 10권을 독파했으며, 매주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을 앞서 이야기한 일주일 먼저 입대한 친구와 군사 우편으로 주고받으며 서로 독려했다.

 

그때의 마음가짐과 열정으로 산다면 뭔가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지금은 그저 강물 위 종이배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햄버거에 딸기잼 바르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 

 

햄버거를 사러 터미널에 갔다가 정말 우연히 함께 일했던 회사 후배를 만났다. 영화 감독을 꿈꾸며 서울로 올라가 영화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인데, 머리에 브릿지도 이쁘게 넣었고 아주 서울 사람이 다 되어있었다. 항상 응원하는 동생과의 갑작스런 만남이 반가웠고,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한번 보자는 약속을 남기고 각자 바쁜 걸음을 옮겼다.

 

약속처럼 올해가 가기 전에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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