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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20년만에 돌려준 졸업 앨범

by Kang.P 202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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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라 그런지 지난 주말에만 지인 두 명의 아버님이 유명을 달리하셨다. 조문을 위해 금요일 밤에는 영월로, 일요일 오후에는 의정부로 향했다. 장례식장을 찾을 때면 몇몇 친한 사람과 연락해서 시간을 맞추기 마련인데 영월에 갈 때도 그랬다.
 
나야 충주에 있으니 가깝지만 친구 녀석은 서울에서 출발하는지라 누구와 어떻게 올 지가 궁금해 물었더니 일본학과 A 후배와 함께 온다고 했다. 예상치 못했던 A의 이름을 듣는 순간!!!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침흘리듯, 그녀의 이름은 나로 하여금 ‘대학 졸업 앨범'을 떠오르게 했다.
 
2003년도 졸업 앨범이었으니까 같은 해이거나 2004년 초중반 정도였을 거다. 그녀에게 졸업 앨범을 빌렸을 때가 말이다.
 
당시 20대 중후반의 나는 오지랖이 넓은 사내였다. 누군가 요청해 오거나 넋두리를 하면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해 주고 싶어 했다. 내가 못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라도 조치를 취해야 직성이 풀렸다. 뭐, 그렇다고 보상이나 대가를 바랐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해야 맘이 편했고 보람을 느꼈던, 그런 시절이었다. 
 
졸업 앨범 사건도 그 오지랖의 연장선에 있다. 후배 B가 2003년도 졸업 앨범이 필요한데 혹시 있냐고 물어보는데, 난 2004년도에야 졸업했으니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엄지를 치켜올리며 '구해볼게, 기다려!'라고 약속을 하고는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2003년에 졸업한 앞서 말한 후배 A에게서 졸업 앨범을 빌릴 수 있었다. 
 

2004년 졸업 당시

 
"일주일 후에 돌려줄게. 그냥은 안 돌려줄 거야~ 한 턱 쏠게!!" 하며 넉살 좋게 빌렸고 A도 그 약속 꼭 지키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건네주었다.
 
그러나.
 
수 일 후 B에게서 앨범을 돌려받았지만 A와 만날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나는 점점 깊은 백수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사람들과의 연락을 멀리하며 의기소침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5년 3월, 취업 성공과 함께 급하게 충주로 이사 와야 했고, 졸업 앨범도 이삿짐 속에 달려 함께 충주까지 내려왔다. 신입사원 신분으로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고, 그런 와중에도 경조사가 있을 때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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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면 종종 A와 마주치는 경우가 생겼는데, "오빠, 설마 내 졸업 앨범 팔아먹은 건 아니지?" 하며 사람 안부 묻 듯 졸업 앨범의 근황을 물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아! 맞다!!! 다음에 꼭 가지고 올라올게. 정말 미안해" 하며 사과하기 일쑤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갈 때쯤, 또 한 번 A와 마주할 자리가 있었다. 그때의 A는 냉랭했고 나 역시 바늘방석이었다. 더 이상 앨범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와 존중, 예의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오로지 앨범을 돌려줄 목적으로 조만간 상경해야겠다' 다짐했지만 이 또한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앨범을 빌린 지 햇수로 20년이 되는 지난 주말. 새벽이슬 맞은 장례식장 앞 가로등 밑에서 마침내 A에게 졸업 앨범을 내밀었다. 미안하는 말과 함께... 스물일곱에 빌린 앨범을 마흔여섯이 되어서야 돌려줬고, A 또한 스물여섯에 빌려 준 것을 마흔다섯에서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다음에 서울에서 함 보자는, 이 또한 언제 지켜질지 모를 약속을 하고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앨범의 무게 때문인지, 힐의 높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마신 소주 2병 때문인지 A는 비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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