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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보름만의 음주

by Kang.P 2023.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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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할머니의 주름처럼 깊이 파이고 갈라진 메마른 논에 수문을 열고 첫물을 들이는 기분과 비슷할 거다. 보름 만에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는 느낌 말이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식도를 통과한 소맥이 장기의 어느 부위를 지나고 있는지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 맛이었지…'

빈 속으로 넘기는 소맥은 짜릿했다. 어제부로 헬리코박터 2차 제균 치료가 끝났고 때마침 아내가 월급날이라며 저녁을 산다기에 오랜만에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큰 딸아이는 나를 닮아서 대패삼겹살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그 정도가 심해진 나머지 집착에 가까워졌다. 딸의 고집에 못 이겨 외식할 때마다 대패삼겹살을 먹어대다 보니 이제는 그 좋아하던 대패삼겹살을 증오할 지경에 이르렀다(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대패삼겹살집에 앉아있다).
 
보름 만에 술을 마셔서 인지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평소 술에 취해도 홍조를 띠진 않았는데 15일 동안의 단절로 인해 장기들이 많이 놀랐나 보다. 꾸준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오랜만에 느끼는 취기다. 이 알딸딸함이 그리웠다. 못 먹게 하니까 더 먹고 싶어지는 반항 같은 갈증도 있었지만, 술을 마셔야만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작금의 상황도 한몫했다. 

글 쓸 때마다 툴툴거리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이렇게 정신없어도 되나' 싶은 요즘을 보내고 있다. 한꺼번에 서너 개의 일을 진행하다 보니, 업무 중요도와 상관없이 급한 일 먼저 쳐내기에 급급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손도 대지 못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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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 속에서 뭔가 변화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급기야 이케아에서 침대와 책상을 질렀다. 아이들 2층 침대를 사면서 안방의 패밀리 침대를 버리고 싱글 매트리스만 놓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꼴이 20년 전 대학 자취방과 똑같았다. 방 상태가 이러다 보니 빨래 등 온갖 너저분한 것들을 펼쳐 놓기 일쑤였으니, 딱 '깨진 유리창 이론'의 표본이었다.
 
결국 안방의 정상화와 이를 통한 행동 변화를 바라며 이케아를 향했던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충주지역은 배달서비스는 가능한데 조립서비스는 불가능했다. 지역의 사설 조립 업체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렇게 된 김에 직접 조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를 좋아하고 결과물에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는 성격이라 가능한 결심이었다. 
 

 
그렇게 3일 동안을 퇴근과 동시에 조립하고 조립하고 또 조립했다.
정말이지 침대는 너무 힘들었다. 특히 수납 침대라 신경 쓸 부분도 많았고 섬세함도 필요했다. 지난했던 3일간의 좌충우돌, 고군분투, 우여곡절, 노심초사 끝에 마침내 안방을 완성할 수 있었다.  
 

 
침대가 생각보다 많이 높아서 식탁 위에서 자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지만 적응하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공부방을 만들면서 사라졌던 내 공간을 안방 귀퉁이에나마 다시 마련할 수 있어서 뛸 듯이 기뻤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 책도 많이 읽고 여러 작업과 구상도 열심히 할 거(라고 다짐은 하지만 장담은 못 하겠)다. 
 
 
대패삼겹살집을 나와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들이 노래방을 좋아해서 외식할 때면 가끔 이렇게 노래방을 찾는다. 내 어린 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을 아이들에겐 해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2차 제균 치료가 끝나서 금주를 접고 술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정확하게 말하면 술이 만들어 주는 야릇한 분위기와 그 속에서 다시금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게 기쁘다는 거다. 
 
그렇게 내 생애 두 번째 제균 치료와 금주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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