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하루

by Kang.P 2021. 6. 1.
728x90

사람 마음이란 게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한다더니 어제는 자존감이 떨어졌다며 그렇게 호들갑을 떨더니, 오늘은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한 채 가끔은 콧노래도 부르며 하루를 보낸다(조울증인가).

오전에 진행된 회의 내용이 다소 짜증났지만, 점심 식사 후 기분 전환도 할 겸 호암지를 한 바퀴 돌며 직장인의 망중한을 즐기려 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그림과 달리, 코디를 잘못한 탓에 회색빛 니트 속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땀줄기를 손수건을 훔치며 걸어야 했는데 그 꼴이 남 보기 우스웠다.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운동 후의 상쾌함보다 꿉꿉함이 더 컸다.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 운동했다는 사실이 큰 성취감으로 다가온다.

오후에는 회사 전체에 물이 끊겼다. 사전 공지 없이 이루어진 단수였기에 담당자에게 민원이 빗발쳤(을 테)고 그는 공사 책임자에게 전화해서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만의 하나 화장실 변기에 앉아 왕성한 배변 활동 중에 단수 소식을 접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호암지를 돌며 흘린 양에 버금가는 식은땀이 쏟아졌다.

금방 풀릴 것 같던 단수는 꽤 오래 지속되었고, 그 시간만큼 축적된 소변의 배출 욕구도 커졌다. 급기야 (소변을 보기 위해) 근처 커피숍이라도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다리를 꼬고 앉았는데, 복도에서 '꿀렁... 꿀렁... 쏴~~' 하는 물소리가 복음처럼 들려왔다. 이렇게 또 신께서는 물의 소중함을 깨닫는 구도의 시간을 마련해 주셨다. 감사하다.

오늘은 퇴근이 일러서 둘째 미술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기로 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꼭 엄마가 데리러 오라고 했단다. 녀석의 고집을 알기에 시간을 정해 아내와 학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다리는 짧지만 걸음은 빠른 내가 먼저 도착해 버렸다. 문 앞에는 딸 친구 엄마들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728x90


문제는 딸아이가 신발은 신다가 문 밖의 나를 발견하면서부터 였다. 엄마가 아님을 인지한 둘째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아빠 가!"라고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랐고, 엄마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에게 고정되었다.

"아~ 맞다~ 오늘 엄마가 오기로 했지~ 엄마 곧 올거야, 걱정 마. 엄마 올 때까지 아빠랑 같이 있을까?" 하며 아이를 달래 보지만, 누가 강 씨 고집 아니랄까 봐 녀석은 일말의 여지도 두지 않고 울며 떼쓰기 시작했다. 왜 아내보다 먼저 도착해서 이 사단을 낸 건지, 원... 다리는 짧지만 걸음은 빠른 내 자신이 미웠다.

'평소에 애한테 어떻게 했길래 애가 저래..', '애가 아빠를 엄청 싫어하나 봐', '저 집은 엄마 혼자 애 보나 봐',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마치 이런 말들이 오가는 것 같았고, 그게 아니라 오늘은 엄마랑 한 약속이 있었는데 그걸 안 지켜져서 화가 난 거다,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더 구차해 보여서 하지 않았다.

약 5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던 상황은 엄마의 등장으로 마무리 되었고, 결국 난 혼자 집으로 왔다. 시간이 흐른 뒤 딸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엄마랑 약속했는데, 엄마가 안 와서 화가 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빠가 데리러 오는 것도 허락해 줬다. 정말 고마웠다.

예상치 못한 소소한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가며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아빠가 미안해

반응형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상포진이라니...  (0) 2021.06.30
책 선물  (0) 2021.06.12
자존감  (0) 2021.05.31
날 닮은 너  (0) 2021.05.24
부고  (0) 2021.05.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