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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짐 싸들고 처갓집으로 간 아내

by Kang.P 2020.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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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짐을 싸든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갓집으로 갔다. 

 

코로나19로 실내에서의 감금 생활이 길어지며 예민해진 나머지,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이런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폭발한 결과, 아내가 짐 싸들고 처갓집에 가겠다며 나간 거 아니냐, 며 흥분한 투로 물어본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황색 저널리즘적 시각이며 사실은 아내가 오랜만에 장모님과 하룻밤 자고 오겠다며 간 것이라고 설명하겠다.

 

쉽게 말해, 일주일 동안 일이 많았던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한 아내의 배려인 것이다. 하지만 둘째가 집에 가겠다고 난리 피우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처갓집이라고 하니, 명절 연휴의 민족 대이동 행렬에 합류하여 몇 시간씩 운전해서 가야 하는 곳이라 생각할 수 있을 테지만, 우리 처갓집은 같은 아파트 건너편 동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남편만 혼자 두고 가는 게 신경 쓰이는지, 외로우면 전화하라고 했다. 그런 아내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결혼 전까지) 17년을 이어 온 자취생의 피가 아직 남아있고, 그렇기에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닌,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그래서 고마워, 여보). 

 

저녁으로 엄마가 직접 빚어서 택배로 보내주신, 정성 가득한 만두로 만둣국을 끓여 먹었다. 만두와 함께 보낸 사골국에 물을 좀더 넣고, 다진 마늘과 고추를 썰어 넣어 칼칼함을 더했다. 맛있었다.

 

 

아내가 만들어 준 혼자만의 시간. 사실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독서, 영화보기, 기타 연습 등) 막상 닥치고 보니, 갑자기 내가 있는 공간에만 중력이 커졌는지,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대부분의 시간을 드러누워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보낸다.  

 

소중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면 어쩌나 싶다가도 문득, '꼭 무언가를 해야 하나?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런 시간도 필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유한하고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러니 너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마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과 잠시 눈 붙이는 꿀맛 같은 낮잠은 사치이고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매 순간 최선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것은, 반론의 여지없는 훌륭한 삶이다. 그러나 충전의 시기를 놓치면 전원이 꺼져버리는 휴대폰처럼, 사람에게도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휴식이 필요하다. 지금이 나에겐 그 시기이기 때문에 오늘의 휴식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게으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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