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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크리스마스이브와 빨간 하이힐

by Kang.P 2020.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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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십 년이 더 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1997년 아니면 98년의 크리스마스이브였을 것이다. 나름 차려입는다고 차려입은 우리 셋은 대학로로 향했다. 대학로에서도 성대 앞의, 가격은 싸고 양은 많기로 소문난 술집을 찾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테이블에는 저렴하지만 양은 푸짐한 감자튀김 세트가 놓여있었고,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빨간 하이힐을 만난 게 이곳인지, 이곳을 나와 2차로 찾은 술집에서 인지는 헷갈리는데 확실한 건, 우리 셋은 입구 쪽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 있었고, 빨간 하이힐과 그녀의 일행은 우리를 등지고 안쪽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스툴 밑으로 보이는 새빨간 하이힐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그렇다. 얼굴도 복장도 전혀 기억이 없지만 빨간 하이힐만은 이십 수년이 지났음에도 잊히질 않는다). 

 

여기는 사내가 셋이요 빨간 하이힐 일행은 젊은 숙녀 셋이다. 그쪽 일행은 가끔씩 손으로 긴 머리를 빗는 시늉을 하며 고개 돌려 우리를 스캔했고, 이 과정에 우리와 눈이 마주치는 아찔한 상황도 발생했다. 이건 필시 신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인연'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우리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가 가서 합석을 권할 것인가를 놓고 조용한 소동이 일었다. 누군가가 총대를 메야하는데, 이 날따라 평소 이런 걸 잘하던 녀석도 선뜻 나서질 않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린 애꿎은 술잔만 비워댔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은 그 녀석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아직도 누가 가서 말을 걸지를 정하지 못한 채 술만 취해가고 있었다. 우리 쪽으로 향해 오던 녀석은 방향을 틀어 스툴에 앉아있는 빨간 하이힐 일행 쪽으로 향했다. '뭐야, 저 새끼는?' 하는 표정으로 우리 셋은 서로를 번갈아 보았고, 그러는 사이 녀석은 빨간 하이힐 일행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몇 차례 들려오더니만, 그녀들은 짐을 챙겨 일어나 그 녀석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따라가 합석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의 지난한 논쟁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럴 거면서 왜 나에게 추파를 던진 것이냐며 찌질한 한탄 속에 술을 부어대고 있자니, 빨간 하이힐 일행이 합석한 자리에서는, 혼성 중창단의 아름다운 하모니와 같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넘쳐났다. 애써 무시하며 우리는 각자 한 해를 정리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귀는 온통 빨간 하이힐 일행이 있는 자리로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겉돌았다. 

 

 

2.

카운터에서 직원에게 사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빨간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은 이리도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 그 녀석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동물적인 육감은 정확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빨간 하이힐 일행과 합석한 녀석들은 웃고 떠들며 진탕 놀다가 하나 둘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비웠고, 결국 여자 셋만 남겨두고 도망쳤다. 카운터에는 '계산은 저기 있는 아가씨들이 할 거예요'라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그 당시는 대학생에게 신용카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여섯 명이 먹어치운 술값을 이들 셋이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우리는 '이런 양아치 새끼들이 다 있나' 하는 울분과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려 나왔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빨간 하이힐 일행'에 대한 측은지심이 커진 나머지 카운터로 다가가 금액을 대신 지불하고, 우리 자리로 데려와서 상한 기분을 위로해 줬다, 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안타깝게도 돈이 없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카운터에서 사정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었던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술집으로 옮겼다. 문을 나서며 돌아보니, 위태롭게 휘청이는 빨간 하이힐의 처연한 모습이 술집 출입문 뒤로 사라졌다. 

 

3.

2020년 크리스마스이브.

일찌감치 아내와 와인 두 병을 해치운 뒤, 아쉬운 마음에 맥주를 더 사러 나가려는 찰나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 친구인 녀석과 지난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이십 수년 전의 '빨간 하이힐 사건'을 소환하게 되었는데, 얼굴도, 키도, 옷맵시도 기억나지 않지만, 스무 살(혹은 스물한 살) 크리스마스이브에 각인된 빨간 하이힐과 당시의 상황만큼은 마흔세 살이 된 지금도 정확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당시 빨간 하이힐을 신고 카운터에서 사정하던 이십 대의 숙녀도 지금은 사십 대 나이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시간이 참 덧없게 느껴졌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소리치며, 지금도 이십 대의 마음과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시절을 추억하고 곱씹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열정과 패기, 호기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특정 날짜가 되면 과거 그 날의 사건을 추억하곤 한다. 코로나19로 전에 없던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맞이한 2020년 12월 24일 역시, 90년 대 후반의 빨간 하이힐의 기억과 함께, 앞으로 계속 회자될 크리스마스이브의 추억이 될 것이다. 

 

 

코로나19 재확산 속 크리마스이브를 기억하고자 마스크를 쓰고 찍은 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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