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20대 주거 변천사

by Kang.P 2023. 6. 30.
728x90

며칠 전 친절한 페이스북은 12년 전 오늘의 기록이라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예성세경아파트 103동에 살 때의 사진이었다. 나름 열심히 청소를 했고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올린 사진 같은데, 이불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축 처진 침낭과 커버를 잃어버린 덕에 (쓸데없이) 스릴 만점이었던 선풍기의 모습이 애처롭다. 
 
정주 여건이 쾌적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니, 어쩌면 그랬기에 저 공간에서 소중하고 다이나믹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의 이사를 하기 마련인데 돌이켜 보면 스무 살에 서울 생활을 시작한 후 결혼 전까지의 이사 과정이 흥미롭다. 
 
믿고 있던 충북학사(당시는 개포동에 있었다)에서 떨어지면서 부랴부랴 친구 따라 외대 앞에 하숙집을 잡았고 그 공간에 적응해 갈 때 즈음 충북학사에서 연락이 왔다.
 
추가 TO가 발생했고 순서대로면 네 차례인데 들어올 의향이 있냐면서 말이다. 학교와 거리는 멀었지만 저렴한 기숙사비에 세끼 식사도 제공해 주고 (나완 상관없었지만) 독서실까지 완비하고 있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반응형

그렇게 충북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등하교하면서 무단 외박을 일삼게 되었고 그로 인한 벌점이 쌓여 강제 퇴소를 목전에 둘 때쯤, 입대를 하게 되었다. 복학하면 다시 학사로 돌아오라며 눈시울을 붉히시는 사감 선생님을 보면서 '아, 미운 정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감 선생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3년 후 복학을 하면서 학교 근처 장위동의 반지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방 두 개와 통로 같은 주방, 그리고 영화 기생충에 나올 법한 화장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나를 포함 대학 친구 셋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조직적으로 반지하 자취방은 '만인의 여인숙'이 되어갔다. 당시 광운대 신방과 학우들 중 우리 집을 거치지 않은 이들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과 견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 3학년으로 복학해서 치열한(?) 4학년 시기를 보내고 졸업을 했다. 함께 자취하던 두 친구는 취업하는 순서대로 반지하를 떠났고 백수의 길로 들어선 나만이 홀로 남아 반지하를 지키고 있었다(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딱 1년의 백수 생활 끝에 충주로 취업을 했고, 당연히 3년 넘게 이어온 장위동 반지하 생활도 종지부를 찍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내 청춘의 기록이다.

 
그리고 충주의 세경독신자아파트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충주에는 '모든 독신자들은 세경독신자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는 조례라도 있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네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삶도 장위동 반지하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보다 조금 더 외로울 뿐이었다.  
 

싸이월드 만세~!!!

 
그렇게 얼마나 살았을까. 대규모 아파트 리모델링을 한다며 모든 입주자에게 퇴거 통보가 전해졌다. 이런 식으로 내보내는 건 뭔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했던 난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약 1.5Km 떨어진 '개나리원룸'에서 충주 생활 시즌2를 시작했다.
 
이곳 바로 뒤에는 건대 축산과 실습장이 있었는데, 가끔 창문을 열 때면 대관령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개나리원룸 창밖 풍경

 
행인지 불행인지 같은 원룸에 친한 동기가 살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매일 밤 술을 마셨다. 하루는 내 방에서 다음날은 동기 방에서, 그 다음날은 다시 내 방에서 마셨다. 그렇게 술에 찌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나 몰래 착실하게 돈을 모았던 동기는 24평 아파트 전세를 구해 원룸을 탈출했다.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회사 선배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며 자신이 살던 원룸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지금 사는 곳보다 넓었고 무엇보다 에어컨을 5만 원에 양도하겠다는 달콤한 조건을 내걸었다. 
 
마침내 나도 에어컨이 달린 원룸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12년 전, 오랜만에 청소한 기념으로 맨 위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남긴 거다. 
 
이렇게 20대의 거주 변천사를 정리하고 보니, 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돈은 없었지만 낭만과 의리가 있었고, 사회적 지위는 없었지만 따뜻한 인간애와 우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
돌아갈 순 없지만
자꾸만
돌이켜보게 되는
나의 20대 청춘이여... 

반응형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균치료  (2) 2023.07.06
주말의 반성  (0) 2023.07.02
2023년 건강 검진  (0) 2023.06.15
혈압약과 의리(?)  (2) 2023.06.04
생애 첫 책 출판  (0) 2023.05.1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