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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생애 첫 책 출판

by Kang.P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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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을 앞두고 본가를 찾았던 지난주 금요일의 일이다. 오랜만에 뵌 부모님과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고 있는데 아버지가 뭔가 생각이 나셨는지 "잠깐!!! 이거 챙겨가라!!" 하시며 책장을 뒤지셨다. 

 

눈앞에서 막차라도 놓친 듯 다급한 목소리에 나 역시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책장에서 무언가를 꺼낸 아버지는 "세상에 세 권밖에 없는 거다."라며 건넸다. 

 

 

책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 입학, 입대와 제대의 과정에서 부모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집대성한 서간집이었다. 아버지의 정성 어린 글씨와 편지를 일일이 복사하는 수고로움,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식에 대한 고마움이 고스란히 담긴 가내수공업으로 탄생한 책이었다. 

 

책은 딱 세 부만 만드셨다고 한다. 한 권은 나에게, 다른 한 권은 동생에게,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부모님이 보관하셨다. 책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져왔는데 아버지가 내 생애 첫 책을 출판해 주시며 꿈을 실현시켜 주셨다(그것도 한정판으로 말이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놀란 건, 부모님께는 한없이 무뚝뚝한 장남이라 생각했는데 편지 속 나는 굉장히 살가운 아이였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표현들이 우후죽순처럼 편지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훈련소에서 보낸 편지에는 당시의 긴장감이 녹아있었고 상병 꺾인 이후의 편지에서는 나름의 관록과 여유가 묻어났다. 또한 아버지께 사죄하는 편지도 있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대들었던 스무 살 어느 저녁의 내 모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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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놀란 건, 편지글의 행간에서 보이는 삶을 대하는 자세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찼으며 자신감이 넘쳤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꼭 성취하겠다는 투지가 넘쳤다.

 

원체 걱정을 달고 사시는 부모님이기에 안심시키기 위한 과장도 일정 부분 있었겠지만 전반적으로 일관성 있는 자신감이 보였다.

 

 

자신감의 발로는 아마도, 통제되고 억압된 군대 조직에서도 잘 적응하고 있으니 사회에 나가면 뭔들 못하겠는냐는 생각이었을 거다.

 

무모해 보이기도 했던 그 시절의 자신감과 자존감이 그립다. 개인적으로 사회 생활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자신감이 줄어든 것 같다. 어쩌면 그 경험들 중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많았기에 스스로 주눅 드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을 쓰게 되고 이런 이유로 내 주장과 의견을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가끔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가 있는데 나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들 바뀌나 보다. 참고, 앞에서 웃고, 성질 죽이고, 처자식 생각하며 심호흡하고...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는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 이십 대의 나와 만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개뿔도 없었지만 당찼던 이십 대의 내가 그리워졌고 동경하게 되었다. 

 

생애 첫 책을 출판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수시로 꺼내보며 이십 대의 나에게 자극 받고 지금의 모습을 추스르며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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