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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아버지와 통닭 한 마리

by Kang.P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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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은 월급날이다. 말이 좋아 월급이지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오전에 통장으로 들어온 돈은 저녁 6시 전후로 알람 폭탄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결국 월급 전과 후의 통장 잔고에 별반 차이가 없는 기현상과 마주하게 되는데, 익숙한 일이라 대수로울 것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또 한 달치 대출금을 납부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저녁에 치킨과 피자를 시켰다.

전에는 맵다며 밀치던 치킨을 이젠 곧잘 먹고, 테두리만 먹던 피자도 전체를 다 먹어치우는 두 딸을 위한 아빠의 작은 선물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소맥을 사놓고 기다리는 모습에서 속내를 들켜버렸다.

치킨에 소맥을 기울이며 약간의 취기가 돌기 시작할 즈음, 문득 그 옛날 아버지가 월급날이면 사 오시던 누런 종이봉투 속 통닭이 생각났다. 그때의 통닭은 지금처럼 생각나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그런 음식이 아니었다. 졸업식날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월급날에나 먹을 수 있는 것이 통닭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대학 시절 즐겨 들었던 '아버지와 통닭 한 마리'라는 민중가요가 듣고 싶어졌다. 이럴 때 우리에겐 유튜브가 있지 않던가. 세상의 모든 노래와 영상을 품고 있는 유튜브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노래는 찾을 수 없었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모든 검색 엔진에서 찾아봐도 가사만 나올 뿐 노래를 들을 수는 없었다. 오기가 발동했지만, 세상에는 오기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아버지와 통닭 한 마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조국과 청춘, 꽃다지 등의 많은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의 추억들을 소환했으며 이는 또다시 지금의 나의 모습을 반추하게 했다.

대학시절 치열했(다고 생각했)던 삶과 지금 모습과의 괴리감이 크게 다가왔다. 당시 내가 추구했던 삶과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어느 순간 아무 고민 없이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고, 가족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는 가장의 역할만을 강조하며 나 자신을 다그쳤다. 가족 공동체와 가장의 역할이 중요치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하는 모습을 보면 보다 극명히 알 수 있다. 수동적인 태도로 임한다는 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없다는 것, 즉 일의 목적을 잃었다는 것이다. 목적이 없다 보니 시냇물 위 종이배처럼 대충 시류에 편승하겠다는 매우 얍삽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이제 겨우 사십 중반인 나이에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문득 두 딸에게 부끄러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삶의 태도를 재정립해야 한다. 아무 고민 없이 그저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지난 시절 나의 신념은 무엇이었으며, 지금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를 구현할지 고민해야 한다. 술이 깨는 순간이었고, 그래서 술을 더 사 왔다.

월급날에 먹은 치킨은, 아버지의 월급봉투와 한 손에 들린 통닭 봉지를 생각나게 했고, 이 모습은 '아버지와 통닭 한 마리'라는 민중가요를 듣고 싶게 만들었으나 결국 들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아버지와 통닭 한 마리'를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노랫말로 대신합니다.

아버지와 통닭 한 마리


김민수 글, 곡 / 노래 조국과 청춘


두 달 만에 아버지가 오셨네
단칸셋방 우리 집에

빚쟁이에 쫓겨 다니시다
몰래 찾아드셨다네

팔다 남은 통닭 한 마리
사 들고 온 아버지 마음

기름에 찌든 통닭여도
난 좋기만 하더라

통닭집 기름이 상했을까
그날 밤 나는 아팠어

작은 방 흔드는 신음 소리에
아버지 가슴은 무너지고

어쩔꺼나 어쩔꺼나
내 자식에게 상한 닭을 먹였으니

(하지만 내가 아픈 건 연탄가스 때문이었지)

돌아보면 눈물 묻어나는
십오 년 세월 흐르고

아버지 가난한 사람으로
지금도 살아 계시네

누구도 아프게 안 했고
그래서 가난한 내 아버지

아세요 그건 내게 주시는
가장 큰 사랑이란 걸

자랑스런 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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