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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태평가

by Kang.P 2020.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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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음악 감독과의 미팅을 위해 영동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데, 예상과 달리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아 다소 당황스러운 상태다. 얼마 전 회사 업무용 차량을 새 차로 바뀌서인지, 전과 달리 승차감이 좋았고, 운전하는 기사 동생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 중이다. 토요일 방송을 앞두고 음악 작업을 최종 마무리하러 가는 길이다. 

 

이제 삼일 후면 지난 7개월 동안의 모든 과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아, 물론 골치 아픈 정산 작업이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방송을 내보내고 나면 쌓여 있는 휴가를 몰아 쓰며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소홀했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지며,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 볼 요량이었는데, 야속하게도 아직 방송도 안 나갔는데 벌써부터 프로그램 합류 시기와 합류할 프로그램 촬영 일정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다. 

 

11월 중순으로 예정된 소규모 인사발령 때문에 인력 재배치가 불가피하다는 건 알지만, 나름 장기 프로젝트를 마치는 것인데, 잠시나마 성취감에 취할 시간과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여유조차 내겐 사치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순간 짜증이 확 나며 뜨거운 무언가가 명치끝에서부터 목구멍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뜨거운 피를 가졌던 이십 대 열혈 청년의 시기를 보낸 지도 언 이십 수 년... 이젠 미혹되지 않는 불혹의 나이에 이르고도 삼 년이나 지나지 않았던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일단 방송부터 내보고 다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정리하고 말았다. 

 

 

조직 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어찌 내 마음대로, 나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루며 살 수 있겠냐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도승처럼 보이겠지만, 난 크리스천이다.(응?)

 

태평가 가사처럼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고, 성화는 받치어 무엇하겠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야지 않겠는가. 일주일 동안 15년 근속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소주 한 잔에 털어 버리련다(어쩌겠는가. 나는 네 식구의 가장이다). 

 

 

최종 음악 작업은 잘 나왔다. 처음 보내 준 작업 내용도 좋았는데, 수정을 요구한 부분도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일이다.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내게도 그런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내일 음악 작업한 오디오 파일로 교체만 하면 더이상 손볼 것이 없(고 손볼 수도 없)다. 이제는 정말 내 손을 떠나는 것이다. '시원섭섭하다'는 게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게다. 

 

최종 음악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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