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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2011년 설, 그리고 방초골

by Kang.P 2011.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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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연휴 중간에 충주로 넘어왔다. 
뭐, 자랑할 일이 아니라 집에는 구체적인 말씀 안드리고 부모님 예상보다 하루 일찍 집을 떠난 것이기에 많이 서운해 하시는 것 같아 죄송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실 터 죄송한 마음을 살짝 접어 놓으련다.

이번 고향길에는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고 갔다. 처음으로 일시불로 D80 (뭐, 지금이야 퇴물됬지만 당시는 나름 비쌌다.)을 살 때는 사진에 대한 열정이 하늘을 찔렀으나, 모든 것이 그렇 듯 시간이 지나면서 책장 한 쪽을 지키고 있는 물건으로 전락해 버렸다.


카메라를 챙겨간 이유는, 이번 명절이 지금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집과 땅을 내 놓으셨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와서 팔린 상태다.

집을 사고 팔고, 이사가는 게 뭐 그리 큰 일이겠냐마는 지금의 이 집은 부모님 평생의 모금자리라고 생각했기에 팔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다소의 충격이 뒷따랐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01년 10월.
이 곳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나는 제대 후 제천의 한 마트에서 까대기(당시 마트에서 쓰이던 은어. 창고에서 물건 들어온 걸 종류별로 분류, 정리한다는 뜻으로 사료됨)할 때인데, 장락동의 2층에서(2층 집이 아니라, 2층짜리 집의 2층에서 전세를 살았다.) 열심히 이삿짐을 까대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은 군바리여서 자세히는 모르나, 동생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이곳은 황무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 땅을 사고, 아버지는 터를 만들기 위해 땅을 골랐고, 평소 분재와 나무를 좋아하시는 당신의 성격을 살려 정원 같은 마당을 손수 가꾸셨다.
그렇게 터를 닦고 집을 지어 마침내 2001년에 이사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전원의 삶을 추구하셨다. 그것 때문에 어린 시절, 고생아닌 고생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안정적인 직장생활 하실 때는 단독주택 관사(나름 괜찮은 대리석 비슷한 벽돌집)에서 지내면서 집의 소중함을 모르고 초등학교 저학년을 보냈고, 아버지가 직장생활과 분재원을 겸하시면서(또 다른 집안 일과 겹쳤지만) 사글세 단 칸 방에서 살아야 했고, 완전 농촌마을에 땅을 사고 그곳에 천막같은 집을 짓고 살기도 했었다. 

IMF시절, 아버지는 명퇴를 결정하셨고, 그 때의 퇴직금으로 지금의 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

복학하고 대학생 때는 솔직히 지금의 집이 싫었다.
친구들 만나고 싶고 할 땐데, 시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고 (당시 난 면허도 없었다.) 한 창 꾸며가는 과정이기에 집에 오면 할 일도 많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집이다.


 

2008년 여름의 모습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사회생활의 쓴 맛(?)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지금의 고향집이 큰 위안이 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집에 갈 때면 아무 생각없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었고, 명절이나 어른 생신 때는 많은 친척들이 모일 수 있었고, 애들은 애들대로 밖에서 흙 먹으면서 놀고, 어른은 어른대로 차 한 잔 나누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아쉬움이 많았고, 이러한 아쉬움이 먼지 쌓인 카메라를 들고 고향집을 향한 것이리라.
















이태리 장인이 정성껏 한 땀 한 땀, 추리링 하나 만들었다지만, 정원을 꾸미기 위해 한 돌 한 돌 손수 옮겨간 우리 아버지의 정성에는 못 미칠 것이다.
사람 한 명 쓰지 않고 직접 돌을 나르셨고, 여러 물건들을 응용하여 정원을 꾸미셨다.

한 때는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몸도 안 좋으신데, 고만 좀 하시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깊은 뜻을 어찌 내가 헤아리겠느뇨...












 



워낙 시내에서 떨어진 곳이라 유선도 들어오지 않았고, 접시를 달아야만 TV를 볼 수 있었던 집.



















추억이 아로새겨진 내 방. (웃통 까고 있는 애는 사촌 동생;;;)
혹여나 명절 같은 때,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 거나하게 술이라도 한 잔 하고 들어온 날이면, 몰래 들어와 창문 활짝 열어놓고(술 냄새를 날리기 위해, 계절에 상관없이...) 기절하듯 잠 들었던 기억과, 서랍 속 지난 날의 추억들이 남아있는 편지며, 일기장들을 꺼내보며 지난 향수에 남겼던 날들이 생각난다.





이번 명절에도 문명의 이기를 십분 활용해, 스웨덴에 있는 동생과 화상통화를 했다.







아이폰은 3Gs라 거울을 놓고 반사를 시켜야만 스카이프 화상통화가 가능하다;;;
끊김 없이 실시간으로 화상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부모님은 많이 놀라셨고, 이 모든 것이 공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 빠지셨다.






8시간 시차가 나는 나라에 있는 막내와 화상통화하는 부모님의 모습.









아마도 다음번에 집에 갈 때는 이삿짐 옮길 때일 것이라는 생각이 크다.
물론 그전에 몇 번 더 찾아 뵙는 게 옳겠지만...




10년 이라는 시간 만큼, 부모님은 늙으셨고,
나 역시 스물넷 복학생에서 서른넷 직장인이 되었다. (거기다 노총각;; 흑흑;;;)

이 글을 남기는 건, 나중에 시간이 흘렀을 때 이 공간을 추억하기 위한 기록이요, 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겼을 때 할아버지가 이렇게 멋지게 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음 명절에는 지금은 알 수 없는 시내의 아파트에서 가족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며 맞이하겠지??
지금은 아쉽겠지만, 그 때가 되면 그 공간 또한 추억이 하나 둘 만들어지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공간 자체보다, 그 공간을 함께하는 사람이 중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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