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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관계의 힘

by Kang.P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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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한 일상으로 보일 텐데, 그도 그럴 것이 동선이라고는 ‘회사 출근-편집실-퇴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좀더 구체적으로 하자면 회사 7층 식당을 추가해야 하지만 말이다).

매일 충주와 청주를 셔틀로 이동하는 이유도 있겠으나 좀처럼 퇴근 후의 술자리가 생기지도, 만들지도 않고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홀로 꽉 막힌 편집실에서 편집기와 씨름하며 지내다 보니,

가끔은...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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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나에겐 살면서 3번에 걸친 변화의 시기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를 1기라고 한다면 대학 입학부터 결혼 전까지가 2기, 결혼 후 지금까지를 3기라 할 수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지극히 소심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소심함이 아니라, 잘 지내다가도 작은 것에 토라지고 그것을 푸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쉽게 말해 친해지기 쉽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에 가면서 많이 변했다. 그 중심에는 ‘학생회’와 사조직 ‘민족의 꼬장을 주도하는 불패의 애주대오, 한술회’가 있었다(‘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에 빗대어 만든 술 먹는 친목 모임이다). 이 활동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다른 성장 배경의 친구들을 만나고 관계가 농익어가면서 나 역시 유연해지고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의 장위동 자취방은 ‘만인의 여인숙’으로 통했고, 내 생일빵이라도 하는 날은 신방과 총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학우들이 모였다. 정말이지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관심과 사랑은 자존감을 높여 줬고 그로 인한 유쾌한 모습들은 다시금 사람들에게 호감으로 다가갔으니, 그야말로 긍정의 선순환 시기였다(그렇다고 좌절과 고민이 없던 시절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1년의 백수 시절을 보내고서야 취직을 했는데 학창 시절의 모습 그대로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상처받는 일들이 생겼고,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학교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습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호감과 공동체에 대한 신념은 버릴 수 없었다.

그 호감과 신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된 후부터였다.

가족을 형성하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해진 건지, 사람 관계에서의 실망이 가족에게 더 집중하게 한 건지 전후 관계가 명확하진 않지만, 결국은 전자와 후자의 유기적 상호 작용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변곡점 중 3기에 있는 지금의 나는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인색해졌다.

누군가 관계를 맺고자 다가서면 딱 그만큼 뒷걸음질 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게 서로에게 편하다. 쓸데없는 감정 노동할 필요 없이 딱 업무적인 관계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고, 함께 어우러져 속내를 터놓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도 부끄럽지 않고, 혹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말이다.

서두가 길었는데 며칠 전, 그런 사람들과 오랜만에 한 잔 했다.

 


술집이 아니라서 좋았고 우리뿐이라 더 좋았다. 모든 제품에는 불량품도 있기 마련인데 당최 술이라는 건 야속하리 만큼 불량품이 없어서 마시면 반드시 취한다. 그리고 마치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라도 하려는 양, 다음날이면 전날 흥겨움만큼의 숙취가 어김없이 따라온다.

그래도 좋다. 일하는 기계가 아닌, 회사의 부품이 아닌, 관계 속의 사람임을 느끼게 해 줘서 좋다.

글 초반에 이야기했던 외로움은 이렇게 사라졌다.

그래, 이런 게 사는 맛일 게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기쁨은 나누고 슬픔은 위로하며 어깨 걸고 살아가는 거다.

그래서 정정해야겠다. 앞서,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인색해졌다'고 했는데 '모든'이라는 관형사를 추가하여, '모든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인색해졌다'라고...

(그래서 이번 주말은 캠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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